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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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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루카 12, 49-50)

안셀름 그륀신부는 ‘불을 붙이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을 붙여야 한다. 비용이 들지도 모른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자신 안에서 동경‘위대한 완성’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해야 한다.”

프랑스의 예수회 회원이며 자연과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말이다. 어떤 영적인 열정이 그를 자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샤르댕은 물질 연구와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다. 그는 위대한 완성을 마음에서 경험하고 싶었다. 그는 연구 대상을 그저 물질로만 여기지는 않았다. 이 세계적인 고생물학자에게 자연은 하느님의 정신과 사랑으로 가득했다. 그에게 진화는 점점 ‘사랑화’로 옮겨 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살(육신)이 되었고, 그 사랑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샤르댕은 동경의 불꽃을 피우라고 말한다. 이 동경의 불꽃은 세상의 비밀을 규명해 주고, 도처에서 하느님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진화를 이해한 과학자는 예수의 다시 오심을 예고하는 종말론적 복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다. 즉 모든 진보는 오메가요, 초월적 중심을 향해 간다는 것이다.

샤르댕을 자극했던 동경은 세상 도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동경이 그를 물질의 중심으로 더 깊이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그리스도교로부터 등을 돌린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희망의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그들의 동경이 세상 도피를 의미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그는 증명해 보일 수 있었다. 동경에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사량, 즉 물질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도 보여 줄 수 있었다. 세상의 물질에는 아드님의 몸으로 현현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동경에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사랑, 즉 물질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 담겨있다는 것도 보여 질 수 있었다. 마음 안에 사랑의 불인 영혼의 불이 있다.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故헨리 나웬은 동향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정신적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이 위대한 화가의 정신분열증을 이해했다. 동시에 고흐의 그림에 나타나 있는 불에 매료되었다. 고흐는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표현한 바 있다. “영혼의 불을 꺼뜨려서는 안 된다. 이 불을 활활 타오르게 더 지펴야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갈구했다. 그는 스스로를 가장자리로 밀려난 불쌍한 인간이라고 느꼈다. 고흐는 ‘희망을 별로, 영혼의 동경을 환하게 빛나는 일몰로 표현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영혼에서 타오르는 불을 꺼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절망의 낭떠러지로 밀려난다 해도 그 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더욱 더 지폈다.

그러나 고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이 ‘난로’에 다가가 불을 쪼이려고 하지 않았다. 형 테오만이 이 위대한 화가의 살아생전에 그의 생계를 위해 단 한 점의 그림을 사 주었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사람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의 그림을 관람하고 있다. 고흐의 그림이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불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故헨리 나웬은 분석한다. 삶의 분주함때문에 꺼졌던 불이 그의 그림을 보면 다시 타오른다는 것이다.

반 고흐가 일생 동안 영혼에 담고 있던 불은 지금도 그의 그림에서 타오르고 있다. 이 ‘불’은 화가의 인간적인 온기와 열정에서 나온다. 이 불을 자신 안에 담는 사람만이 다시 그 불로 다른 사람을 타오르게 할 수 있다.

오늘날 반 고흐의 그림을 관람하며 그 속으로 침잠하는 사람은 사랑의 동경을 만난다. 그리고 열정적인 화가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고,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까지도 화가의 내면에서 활활 타는 불을 품을 수 있도록 해 준 바로 그 힘을 만난다.

독일의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사랑과 동경을 노래한다. 동경은 하느님이 영혼에 심어 놓은 흔적이다. 동경 안에서 우리는 신성한 불꽃을 느낀다.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다.

괴테는 에로틱한 사랑, 하나가 되는 섹스의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랑의 섹스 행위에도 보다 높은 것에 대한 새로운 욕망이 있다. 사랑을 하며 애인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자신이 무한히 넓은 곳을 갈망하고, 빛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불나방이라고 느낀다. 사랑에 굶주린 불나방은 불과 하나가 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든다.

아빌라의 데레사에게도 불나방은 신비의 차원, 즉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동경에 대한 상징이다. 하느님과 하나 되기는 자기 자신을 극복할 때만 가능하다. 괴테가 말하는 신성한 동경은 결국 하느님에 대한 동경이다. 괴테는 ‘위로 솟아오름’에 대해 즐겨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눈을 ‘위로’ 향하여 도움을 청하듯 하늘을 본다. 괴테는 이러한 동경의 시선이야말로 본질적인 인간의 속성이라고 설명한다.

“지상의 수천수만 가지 현상들이 인간을 매료한다 해도, 탐구하고 갈망하는 인간의 시선은 저 위의 무한한 공간, 하늘로 향한다. 자신이 그분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천상왕국의 주민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깊고 분명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괴테는 인간이 지상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인간의 무한한 동경이 그의 갈구하는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자극한다는 사실도 괴테는 알고 있었다. 인간은 지상의 주민일 뿐 아니라 천상왕국의 주민이기도 하다. 두 왕국을 모두 받아들일 때 인간은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

괴테는 양 극을 함께 보았다. 인간의 온전한 형상을 추구한 괴테의 시선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완전한 존재, 즉 지상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 태도가 절실하다.

내 마음 안에 사랑이 영혼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사랑의 갈망이 타오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자기를 품에 안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을 어루만져 주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 주는 사람을 우리는 동경한다. 그러다 이 동경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들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

생텍쥐페리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랑을 동경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사랑을 동경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라고? 이 말의 진의를 잘 해석해 보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사랑을 동경하는 나는 이미 사랑할 능력을 지녔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동경에는 이미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사랑을 동경하는 나는 이미 그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랑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있으면, 마음에 떠오르는 사랑의 동경을 느낄 수 있다.

페터 쉘렌바움은 저서에서 동경과 사랑의 밀접한 연관성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동경이 없는 사랑은 없고, 사랑이 없는 동경도 없다. 동경과 사랑은 같은 신체 부위 즉 심장에서 연결된다. “사랑과 동경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가슴 한가운데 심장을 손을 얹기 때문이다.” 이 동작은 사랑이 심장에서 흐른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철학자 헤겔은 말했다. “열정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심리학자 필립 레어쉬는 열정이 자신을 초월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 한다. 강력한 충동이라는 점에서 열정과 동경은 닮았다. 열정과 동경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이다.

초기 수도승들은 열정이 ‘감정을 북돋우며’, 인간을 자극하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정을 잘 다루는 것, 즉 하느님에게로 가기 위해 열정을 이용하고 욕망 안에 숨겨진 동경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영성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근본적인 의문은 결국 동일하다. 모두가 동경을 만나기 위함이다.

한 가지 길은, 삶을 직시하면서 욕망, 중독, 열정, 욕구, 소망, 희망 안에 숨겨진 동경을 찾는 것이다. 경험한 모든 것을 끝까지 생각하며, 그 근본에까지 이르는 것이 한 가지 가능성이다.

다른 길은 영적인 길기도를 통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도의 과제를 동경에 불을 붙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의 기도를 외우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할 때, 구태여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해 달라고 간청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동경의 불씨를 살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편은 동경의 노래이다. 시편의 노래를 부르면 우리 안에 있는 진정한 고향에 대한 동경이 자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의 노래를 방랑자의 노래와 비교한다. 그 시대에는 강도를 피하기 위해 밤에 여행했다. 그러나 강도 대신 어둠이 방랑자를 두렵게 했다. 방랑자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향 노래를 불렀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낯선 세상에서 어둠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하느님에 대한 동경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기도의 최고 형식은 노래다. 그는 이를 신학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Cantare amantis est(노래는 사랑하는 사람의 몫이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노래는 우리를 내면, 즉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고향을 느끼고, 온전해지고 치유되는 내적인 공간에 이를 수 있다. 내적인 공간에서 자기 자신에 도달하고 고향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자신 밖에 있는 낙원을 찾는 동경이 필요 없다. 이 세상을 뛰어넘는 동시에 이 세상의 혼잡함 속에서 살 수 있게 하는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동경을 만나면 억압을 극복할 수 있다. 신앙이 두터운 그리스도인들은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가능한 한 고통 없이 수동적으로 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하느님은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큰’ 어머니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결코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모든 것을 어머니가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는 어린아이로 남을 뿐이다.

기도의 첫 걸음은 우리의 중독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기도의 두 번째 걸음은 기도를 통해 동경의 불씨를 당기는 것이다.

기도의 세 번째 걸음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이 살아 계신 내적 고요의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그곳에서 우리는 완전한 나 자신이 된다. 그곳에서 진정한 자아를 만나고, 나 자신 곁에서 살게 된다.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 곁에서 고향을 느낀다.

사랑의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는 목마르다고 타는 사랑에 갈증을 절규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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