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상지원단

관상지원단 역사

관상 지원단 역사


 관상 지원단은 1970년대 초반, 메사추세츠 주 스펜스 성 요셉 수도원에 있었던 세 수사의 원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령에서 영감을 얻어, 이 수사들은 평신도들에게 호소력 있고 접근하기 쉬운 그리스도교 관상 기도 방법을 계발하고자 했다. 자신들의 원의가 결국 국제적인 조직체로 자라나리라는 것을 전혀 모른 채, 토마스 키팅, 윌리엄 메닝거, 바실 패닝턴 신부는 실험에 착수했다. 그들의 시도를 오늘날 관상지원단이라 부른다.

 

 성 요셉 수도원장이었던 토마스 키팅 신부는 1971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 참석했다. 그 회의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은 성직자들에게 수도자와 평신도 모두의 삶에서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부흥시키도록 요청하셨다. 이러한 부흥의 중요성을 믿은 키팅 신부는 성 요셉 수도원의 수사들에게 동방의 명상 수련법만큼 현대인들에게 호소력 있고 접근하기 쉬운 그리스도교 관상 기도 방법을 계발하도록 고무하였다.
같은 수도원의 윌리엄 메닝거 수사는 14세기의 익명의 고전 『무지의 구름』에서 그러한 기도 방법의 배경을 발견하였다. 이 책과 또 다른 관상 서적을 이용하여, 메닝거는 단순한 침묵 기도 방법을 계발하고 그것을 ‘구름의 기도’라고 불렀다.

 

 메닝거는 그 수도원에 피정하러 온 사제들에게 ‘구름의 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기도는 환영받았고 소문이 퍼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 했고, 키팅 신부는 스펜서의 평신도들에게 연수를 제공하였다. 같은 수도원의 바실 페닝턴 수사 역시 성 요셉 수도원 밖에서 피정에 온 사제와 수녀들에게 ‘구름의 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믿음-우리는 오직 이 믿음만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알 수 있다-에만 온전히 초점을 맞추는” 기도라고 했었다. 한 피정에서 누군가가 토마스 머튼의 이와 같은 관상 기도 정의를 언급하면서 이 기도의 명칭을 향심 기도로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그때부터 이 기도를 향심 기도라 불렀다.

 

 1983년에 키팅 신부는 뉴 멕시코 산 크리스토블의 라마 재단에서 처음으로 향심 기도 집중 피정을 제공했다. 그 피정에 참석한 구스타브 라이닝거는 그 전에 키팅 신부와 에드워드 베드너라는 사람을 만나서 관상 조직망의 출범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이 모임 이후, 베드너는 자신이 관상 지원단이라고 부른 기금 마련안을 작성하여, 뉴욕에서 향심 기도를 소개하는 본당 프로그램을 시작할 기금을 제공받았다. 이것이 관상 지원단의 향심 기도 프로그램의 시작이자 하나의 기구로서 관상 지원단의 탄생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라마 재단에서 행한 피정의 다른 참석자들도 관상 지원단이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85년에, 그 피정의 참석자 데이비드 프레넷과 메리 므로쪼브스키는 밥 바르텔과 함께, 미국 동부에 크리살리스 하우스라는 생활 공동체를 설립했다. 11년 동안 크리살리스 하우스는 계속해서 향심 기도 연수와 피정을 개최하는 장소로 제공되었다. 관상 지원단의 일을 수행하는 많은 향심 기도 수련자들과 교사들이 크리살리스 하우스에서 훈련받고 영감을 얻었다.

 

 세 수사의 시도는 1986년에 관상 지원단이라는 법인체가 되었고, 첫 이사진이 지명되었다. 초대 회장으로 키팅 신부, 부회장으로 칼 아리코 신부, 재무 담당 구스타브 라이닝거, 그리고 이사로서 메리 므로쪼브스키와 게일 피츠페트릭 호플러가 지명되었다. 처음에 이 기구의 운영은 게일 피츠페트릭 호플러의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다. 몇 번의 확장 후에, 이 국제 본부는 이제 뉴 저지 주 버틀러 시내에 2천 평방 피트 크기의 사무실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일곱 명의 정직원, 두 명의 일용 직원, 다섯 명의 자원 봉사자의 도움과 성령의 지속적인 지원과 인도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