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상지원단

2013.03.14 23:56

주님 공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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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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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 인생길의 내비게이션(navigation)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 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5)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에 너희 아버지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한 자 되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고대 셈족은 유목민으로서 그들의 생활에서 길은 중요한 역할, 즉 생명에로 이끄는 길 역할을 한다. 그들은 종교적 도덕적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길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히브리어에서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에서도 그렇다 하느님의 길이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다.(창세 12,1-5) 그때부터 끝없는 모험이 시작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길을 알아내어 거기에 따르는 것이다. “나의 길은 너희들의 길과는 다르다”(이사 55,8)라는 주님 말씀 속에 나타나 있듯이, 하느님의 길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때도 있지만 결국 목적지로 이끌어 준다.


이집트 탈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느님의 길을 가리키는 뛰어난 예는 이집트 탈출 사건일 것이다. 이때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미가 6,8)는 것과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절감했다. 하느님께서는 구름 기둥이나 불기둥으로 당신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시면서(탈출 13,21-22), 친히 선두에서 길을 인도하신다. “당신의 길은 바다 가운데 있으며, 당신의 작은 길은 홍수 가운데 있다”(시편 77,20)고 하듯이 바다도 하느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인은 이와 같이 해서 이집트인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


다음에 광야의 유랑이 뒤따른다(시편 68,8). 하느님께서는 여기서도 그의 백성을 위해 싸우시고,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보살피듯이” 그들을 보살펴 주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다. “야훼께서는 백성의 잘 곳을 찾아 주시고”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없도록 배려하신다(신명 1,30-33). 또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신앙 부족을 벌하시기도 한다. 사실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광야의 시대는 시련의 시대로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하느님의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신명 2,1-2). 그래도 이 길은 반드시 끝이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행복의 땅에서 쉬도록 인도하시는데, 거기서 흡족해진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님을 찬미하게 된다(신명 8,7-10). 이리하여 “야훼의 길은 사랑이며 진실이고”(시편 25,10;136) “그의 모든 길은 바르시다”(신명 32,4)는 것이 밝혀진다.


이집트 탈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념행사가 그때부터 매년 과월절(파스카)과 장막절에서 재현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된 민족정기를 드높였다.

율법-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도착해서도 “야훼의 길을 걷기”를(시편 128,1)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이 길을 아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다(참조 시편 147,19-20). 하느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지식의 길을 남김없이” 알려 주시며(바룩 3,37), 곧 “하느님의 규칙을 근본으로 하여 율법만이 영원할 것이다”(바룩 41). 따라서 계약을 지키고 광명과 평화와 생명을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는(바룩 3,13-14), 그 백성은 “야훼의 가르침에 따라 걸어야 한다”(시편 119,1). 율법은 하느님의 길이므로 그곳에는 인간이 참으로 행해야 할 길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 대해서 불순종했기 때문에 길을 잃고 마침내는 타락하고 만다(신명 31, 17). 그에 대한 야훼께서 가하신 최후의 제재가 유배이며(레위 26, 41), 그것은 이집트 탈출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길이다(호세 11,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백성을 망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는 없었다(레위 26,44-45). 그래서 그들은 다시 “야훼를 위해 광야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 또한 하느님께서도 백성들이 의기양양하게 귀환하도록 “한적한 곳에 길을 내시고”(이사 43,19), “모든 산을 길로 만드신다”(이사 49,11).


두 가지 길이 있다.


유대교 시대에는 사람의 도덕적 처신을 “두 가지 길”에 대한 가르침으로 요약했다. 결국 사람의 처신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좋은 길과 나쁜 길이다(시편 1,6; 잠언 4,18-19; 12,28). 덕행의 길 즉 곧고 완전한 길(1사무 12,23; 1열왕 8,36; 시편 101,2.6; 1코린 12,31)은 정의의 실천(잠언 8,20; 12,28)과 진리에 대한 충실함(시편 119,30; 토비 1,3), 평화의 추구에 있다(이사 59,8; 루가 1,79). 지혜 문학은 바로 여기에 “생명의 길”(잠언 2,19; 5,6; 6,23; 15,24)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 길은 또 장수와 번영을 보증한다.

나쁜 길 즉 굽은 길(잠언 21,8)이란 어리석은 자들(잠언12,15), 죄인들(시편 1,1; 집회 21,10), 악인들(시편 1,6; 잠언 4,14. 19; 예레 12, 1)이 걷는 길이다. 이 길은 멸망(시편 1,6)과 죽음(잠언 12,28)에 이르는 길이다. 이 두 가지 길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건 그것은 자유이지만, 각자는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야 될 것이다(신명 30,15-20; 집회 15,12). 복음은,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이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적은 반면,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넓고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많다는 것을 지적한다(마태 7,13-14). 생명의 길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유배에서 귀환은 장차 이루어질 결정적 사건의 예수에 지나지 않는다. 제2 이사야가 새 탈출을 두고 표현한 “주의 길을 준비 하라”(루가 3,4=이사 40,3)는 말로 요한 세자는 이 결정적인 사건을 예보한다. 메시아시대는 바로 새로운 탈출인데, 이 탈출이야말로 사람을 확실히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휴식에로 인도한다(히브 4,8-9). 예수께서는 새 모세로서 이 길의 안내자, 동반자, 지도자이시다(루가 24,15; 히브 3,5-6; 12,2-4). 그분은 당신을 따르도록 사람들을 부르신다(마태 4,19; 루가 9, 57-62; 요한 12,35-36).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영광스런 나라를 미리 맛보게 이 길을 잠시나마 비추었으나, 수난의 예고는 먼저 갈바리아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십자가의 길을 거치지 않으면 영광에 들어갈 수 없다(마태 16,23; 루가 24,26; 9,23; 요한 16,28). 그러므로 예수께서 결연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오르신다. 그 길은 끝에 희생이 기다리고 있는 “오르막 길”이다(루가 9,51; 20,22.33). 그러나 이 희생은 옛 제의와는 달리 바로 하늘에 도달하며(히브 9,24), 동시에 사람들에게 하늘에로의 길을 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성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당신 몸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트셨다(히브 10,19-21). 사도행전에서는 막 탄생한 그리스도께서 “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사도 9,2; 18,25; 24,22).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참다운 길을 찾아냈음을 깨달았다(히브 9,8). 그리고 이 길은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요한 14,6). 그리스도인들의 빠스카와 탈출이 그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길을 따라서(에페 5,12; 1코린 12,31), 그분과 함께 걸어야 한다(필립 3,12-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만 한 성령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간다.(에페 2,18)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하느님께서 피조물의 존재와 삶을 위해 세워주신 목적을 거부할 때, 바로 이 「하느님의 모상과 모습」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창조된 선을 아주 깊이 일그러지게 한다. 특히 인간처럼 하느님의 모상과 모습으로 된 존재 안에 깊은 일그러짐을 가져온다.”


이렇게 “일그러진 모습”이 새로워지게 하는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聖 Augustin은 “길이신 구주” “좁은 손 길”로 표현한다.


“길이신 나의 구주, 그분이 내 마음에 즐거웠으나 좁은 손 데로 간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마태 19,12).… 나는 이미 값진 진주를 발견했고, 가진 바 모든 것을 팔아서 이를 사들여야 했건만 아직도 망설이고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이처럼 聖人은 그리스도를 모델삼아 그 빛의 인도로 새 길에 들어섰지만 그전에는 너무나 그리스도를 모르고 지나왔었다는 과거의 되돌아보시며 주님 당신을 너무 늦게 알고 잘못 된 길에서 방황하는 고백록을 저술하신 것이다.


그대가 시내에서 집을 찾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대는 사람들에게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알지요. 저 큰길로 죽 내려가서 성당이 나오거든 오른쪽으로 돌아 두 구획을 더 내려가세요. 그런 다음 왼쪽으로 돌면 길 오른 쪽 다섯 번째 집이에요.”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난감해하는 당신이 안쓰러워 이렇게 말하리라. “이봐요. 지금 가르쳐 준 방향 같은 건 다 잊어버려요. 집을 가르쳐 줄테니 날 따라와요.”


예수께서 당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되시는 사람으로서 오신 것이다.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로 오시는 하느님의 길이 되신 분이시다. 또한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인간의 길이 되시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5)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오 7장 13)

사랑과 정도의 길이 좁고 어렵다는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에게는 “십자가의 나무에서만큼 하느님의 사랑의 불을 불붙인 나무가 없다는 것이다.

군중을 따라 가지 말고 사람이 적게 다녀도 정말로 가치가 있고 진정 우리들이 좋아할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삶의 길에는 표지판이 없는 지라 정말 가치가 있는 길이 어딘지 알 수 없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져, 엉뚱한 길로 빠지기도 한다. 지금 삶의 뒤안길에 서서 생각하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회한이 가득하기도 하다. 차라리 그때 그 길로 갔더라면... 그러나 이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내가 선택한 길을 믿으며 오늘도 터벅터벅, 한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더 나아갈 뿐이다.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못한 길같이 말이다.



가지 못한 길

-
로버트 프로스트 -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뿐인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덤불 속으로 한 쪽 길이 감돌아간 저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에 못지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이 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다 비슷했지만 이 길은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해서였습니다.


그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직

발자국에 더렵혀지지 않은 낙엽에 덮여 있었습니다.

다른 길은 언젠가 가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리라 알고 있었지만.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노라고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노라고.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 놓았다"고 말입니다.


“삶의 길에는 표지판이 없어... 삶은 하나의 길을 택하는 여정이다. 시 속에서는 두 갈래 길을 만났지만 우리 앞에는 수십 갈래, 수백 갈래 길이 있다. 그중에서도 역사적 인물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있다.


하느님 말씀의 본질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상통하는 메시지를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앙만이 성서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즉 성서 말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구원자이심을 알려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다는 바로 거기에 신앙의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 또는 교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중심 과제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가가 아니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하시는가이다. 이것을 전문가들은 구세사라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셨고, 그 계획을 어떻게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전개해 나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성서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신원(身元:Identity)을 형성한다.


신약성경의 선포가 예수님의 부활이후 공동체의 신앙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고, 동시에 그러한 과정의 증거라는 것이다.


인간은 찾고 묻는다. 하느님은 이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 말씀으로 나타내시며 대답하신다.


성서야말로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구원의 성령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는 진리의 원천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빛이다 하신 바로 그것이 성서다.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시고 함께 머물러 사셨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이 성서의 말씀대로 살아 갈 때 그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빛이 된다. 너희 주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의 주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가 보여주신 길만 따라가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하여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냐?(신명기 10,11)


따라서 기도 묵상 생활 중에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라가야만 하느님 나라 사는 길을 따라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길을 정확하게 일러주는 장치인 내비게이션 길안내 장치를 차 안에 달고 다녀서 그대로 믿고 받들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길 표시가 잘 되어 있다는 유럽의 나라 국경이 우리나라의 경계같이 함께 있고 복잡한 산악지대에서나 대도시에서도 내비게이션만 믿고 자동차 운전하다 보면 스위스 산골짜기에 있는 어느 별장까지 안내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정확하구나.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지경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길에 하느님 나라 사는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라는 것이 어느 날 묵상 중에 떠올랐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길이시자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인간의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앞서가신 인간의 길이 우리 인생의 길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라는 것이다.


얼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 말씀이 우리 인간은 가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 하느님 나라로 안내한다는 믿음 하나로 따라 사는 것이 신앙인의 신원(Identity)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일을 바로 나를 위해서 길이 되셨다. 인류라는 막연하고 일반적인 대상을 상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나’라는 구체 인간을 상대로 하였다. 예수님은 그저 세상의 구세주이신 게 아니라 내 개인의 구세주이시다. 나를 위해 죽으셨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정말로 우리가 이런 소신에 이른다면 삶이 달라진다. 환한 빛이 켜진다. 전대미문의 신뢰가 생긴다. 새롭고도 무너지지 않는 용기가 솟는다. 우리도 하느님께 한 발자국 나아가야 한다. 복음의 구절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두신다. 제안을 하실 따름이다. 당신 선물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배척하고 거절하였을 적에도 위협과 성토를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화내면서 떠나지도 않으셨다. 그냥 다른 곳으로 떠나가셨다. 한번은 제자들이 찾아간 곳에서 사람들이 맞아주지 않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불사르게 하자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예수님은 그들을 돌아보시면서 엄히 꾸짖으셨다(루카 9,54).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심약하시다.” 우리의 자유를 무척이나 존중하신다. 우리끼리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존중하신다. 거기서 크나큰 책임이 따라 온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내 앞을 지나가 버리시는 예수님이 두렵다.”(Timeo Jesum transeuntem)는 말을 했다. 내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실지도 모른다. 내가 맞아드릴 마음을 먹기도 전에 말이다. 그날 나자렛 사람들에게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인내하시며 오래 바라보시다가 때가 되면 눈물잔치를 하고 무릎을 꿇게 만드는 묵언의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시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그분은 벌써 수천 년 전에 너무나도 상세하고 정확하게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문자로 그려 놓으셨답니다.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이렇게 해라, 이 사람을 만나라, 그를 따르라, 거기로 가지마라 등등….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기 쉽게 마음의 지도로 그려 주시고 인간으로서 사는 길을 가르쳐주셨는데, 우리는 자꾸만 다른 길로 가면서 ‘길을 모른다’, ‘길이 없다’라며 방황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우리들의 기도 생활 중에 대개 말씀하시면서 우리 마음과 생각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 말만 따랐더라도 인간 내면의 행복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요. 그래요. 저는 압니다. 하느님의 그런 속내의 뜻을 알 것 같다. 그렇다. 그것은 진정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잘못 사랑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앞서 말한 자동차 길 안내 장치인 내비게이션은 목소리만 있고 실체는 없어도 잘 믿고 따라 간다. 우리 인생길에 가장 믿을 만한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은 믿지 않고 따라 살지도 않는다는 것이 아이러니 역설적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우리의 자손들이 장차 유치원 시기부터 서로를 경쟁자로만 인식해 ‘무한 경쟁’에 몰입할 것인지 아니면 서로를 배려해주고 도와주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 것인지는 지금 우리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우리들의 삶의 가치관 형성에서 존재에 대한 물음보다도 소유에 대한 관심을 더 갖고 있어 내가 소유한 만큼 내가 존재한다는 불신 우상에 노예로 전락하여 버린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에서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길로 들어서야만 한다. 매일미사 말씀의 전례에서 오늘의 일용한 양식으로 오늘의 성경 말씀을 따라 오늘 하루도 살아 나아가야만 한다. 그 때에 주의 기도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청한 기도가 내게 오늘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매일 일상 기도생활 중에서 내게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인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 안내 말씀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찾아가는 길에서 정확하게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 (시편 105)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당신 말씀을 묵상하고 싶어서

이 내 눈은 밤새도록 떠 있나이다.(시편147)


나는 내 길을 살펴보며 당신의 영을 따라 발길을 돌렸나이다. 재빠르고 지체 없이 당신의 계명을 지켰나이다.(시편 118,59)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하늘과 땅이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 55,8-9)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 6-11)

아버지의 뜻이 당신의 음식이요, 아버지 영광을 따라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의 길인 성경말씀은 우리 인생의 길에서 하느님의 나라로 사는 데로 인도하는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다.

* 안충석 신부님은 2010년 일원동 성당에서 은퇴하신 원로 사제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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