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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인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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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는 맹인이고 걸인입니다. 그는 늘 길거리에 앉아 구걸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눈을 뜨고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맹인이었던 그가 보게 되었다는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예리고로 갔다가 다시 나올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야기는 그동안 예리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일행이 계속 길을 가고 있는 중이란 사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열에서 소외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르티매오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과 함께 가고 있을 때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걸인이었기 때문에 홀로 외딴 곳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맹인이었습니다. 이야기에서 맹인은 바르티매오 뿐입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47). 무슨 뜻일까요? 그는 왜 이렇게 외치는 것일까요? 이야기는 두번씩이나 그가 이렇게 외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군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바르티매오의 애절한 외침은 맹인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걸인으로서 외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살펴 달라는 간절한 도움의 외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의 아들께 자비와 동정어린 시선을 구했습니다.
맹인은 분명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이 맹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 외침에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 외침은 길을 가시던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를 부르시오"(49). 예수님은 바르티매오의 외침을 어떻게 들으셨을까요? 그리고 왜 직접 부리지 않으실까요? 바르니매오를 박해하며 침묵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도리어 용기를 주었습니다. "힘내시오. 일어나시오. 그분이 부르십니다"(49). 군중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르티매오를 직접 부르시지 않고 군중을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군중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군중을 변하게 하셨습니다.
바르티매오는 벌떡 일어나 겉옷을 내던지며 예수님을 향해 갔습니다. 그는 즉각적으로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말입니다. 그는 걸인이던 자신을 벗어 버렸습니다. "스승님,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51). 맹인은 더 이상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라는 뜻의 랍부니라고 불렀습니다. 이 변화는 무엇일까요?
다시 보기를 원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을 말하셨습니다. "가시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52). 눈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치유의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과연 바르티매오의 어떤 믿음이 그를 구원에 이르게 했을까요? 예수님은 그에게서 어떤 믿음을 보신 것일까요?
바르티매오는 즉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른다는 것은 제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랍부니, 스승이신 예수님을 보며 따라나섰습니다. 유일하게 바르티매오만이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바르티매오를 꾸짖었습니다. 아무도 나자렛 사람 예수가 다윗의 아들, 메시아, 자신들이 기다렸던 예언자인 줄 보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묵상입니다.
시인들이 노래했듯이 주님의 법은 환하여 눈을 밝혀 주시는 빛이었습니다(시편 19, 9 참조). 그대는 그리스도를 받으십시오. 시력을 받으십시오. 그대가 하느님과 인간을 잘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대를 비추어 주신 말씀은 금보다 보석보다 더 바람직하고 꿀보다 진꿀보다 더욱 단 것입니다(시편 19. 11참조). 암흑 속에 묻혀 있는 정신을 비추고 빛의 운반자인 영혼의 눈에 시력을 주신 분이 어떻게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태양이 없다면 다른 별들이 있어도 모든 것은 칠흑 같은 밤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말씀을 알지 못했고 말씀으로 빛을 받지 않았다면, 그대는 암흑 속에서 살찌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죽음을 위해서 사육되었을 것입니다.
그대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빛을 받으십시오. 빛을 받아 주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과연 주님께서 당신 아버지께 드린 약속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고 그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나이다"(시편 22. 23참조). 그러므로 그대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십시오. 아버지를 알도록 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은 그대를 구원할 것이고 그분의 노래가 그대를 가르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대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방황했습니까? 하지만 주님이 그대를 비추셨으니 당신을 통해 그대가 하느님을 발견하고 아버지로 모시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대는 그분과 함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형제가 된 그대를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진리를 망각하는 행실을 그만 두십시오. 그대의 시력을 안개처럼 가리는 어둠과 암흑을 쫓아 버리십시오. 무엇보다도 참다운 하느님을 향해 ", 빛이신 당신께 인사드립니다"라고 환호성을 지르며 하느님을 관조하십시오. 그대가 암흑 속에 묻혀 있었고 죽음의 그늘에 포로가 되었을 때, 이미 하늘에서 태양보다 더 순수하고 이승의 삶보다 더 달콤한 빛줄기가 그대를 위해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이 빛줄기가 바로 영원한 생명이며 이 빛에 참여하는 모든 것은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밤은 빛을 경계했습니다. 그 빛이 사라져 밤이 주님의 날에 자리를 내줄까 봐서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해가 지지 않는 빛이 되었습니다. 서쪽이 동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창조였습니다(갈라 6, 15 참조). 모든 곳을 달리는 정의의 태양이 차별없이 모든 인류를 방문했기 때문입니다(말라 3,20 참조). 정의의 태양이신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해를 떠오르게 하시는 당신의 아버지를 닮고 있었습니다(마태 5,45 참조).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진리의 이슬을 내리셨습니다. 그분은 동쪽을 서쪽으로 지나가게 하셨고 죽음을 십자가 위에 못박음으로써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멸망으로부터 건져냄으로써 멸망을 궁창 위에 붙박아 두셨습니다. 그분은 부패를 옮겨 심어 그것이 썩지 않게 하셨고 땅을 하늘로 바꾸셨습니다. 그분은 신적인 농부셨습니다. 이 농부는 농사에 적절한 절기를 알리고 백성들에게 좋고 힘든 농사일을 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진리에 부합하는 삶의 방식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당신 아버지의 유산을 그대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유산은 참으로 거대하고 신적이며 변질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백성들의 가슴 속에 법을 넣어주시고 그들의 마음에 사랑을 새겨 주심으로써 당신의 천상적인 가르침으로 인간들이 당신과 같아지도록 하셨습니다(예레 31,33 참조). 그때는 더이상 누가 누구에게 주님을 알아 모시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고 낮은 자에서 높은 자까지 모두가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예레 31, 34 참조).
그대는 생명의 법을 영접하십시오. 하느님의 권고에 순종하고 그분을 알아 모시는 일을 배워 하느님의 용서를 받도록 하십시오. 물론 하느님은 이것이 필요하지 않지만 감사의 기도도 드리십시오. 그대의 순종과 존경을 집세로 바치십시오. 이승의 삶에서 집세를 집주인에게 바치듯이 말입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권고> 11, 113-115 참조, 215년 귀천).

- 그대에게 온 편지 -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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