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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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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도생활이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순수하게 정화시켜 비워서 하느님으로 채워서 하나가 되게 하려는 열망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대로 “또도 나다(Todo - Nada)” 즉 “모두 無”, 달리 말하면 하느님은 나에게 모두이신 그 하느님으로 채워져서 나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를 온통 하느님께 드리는 것, 우리의 영을 들어 올려 모두 바쳐서 성령께 봉헌하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게 하시는 가장 수동적 기도 생활인 것이다. 주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의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아빠에게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봉헌한 어린아이 같이 수동적 기도생활을 말한다.
우리말 미사에서 사제가 신자들을 기도에 초대할 때 “기도합시다”라고 하는데, 독일어에서는 “기도하도록 우리를 내버려둡시다(lassset uns beten)”라고 한다. 기도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기도는 내 의지나 의도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기도하도록 내버려두는 데서 진실하게 이루어진다. 내 의지대로 -때때로 밤을 새워가면서까지- 기도하려고 애를 쓸수록 기도가 되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체험하는가. 수동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놔두는 기도’를 온몸으로 익혀야 한다.
Maestro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성을 벗어남. 우리는 어떻게 해야 완전히 단순해질 수 있는가? 사물과 자신을 떠나고 자신의 정신을 알고 영혼이 지닌 능력의 활동을- 가장 중요한 능력인 이해의 활동을 제외하고 -알게 됨으로써 단순해질 수 있다. 이해의 활동에 대해서는 오직 하느님께 맡겨라. 수동적 영혼은 모든 것을 내어놓아 하느님께서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시도록 내맡긴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영혼 안에 당신의 완전한 모상을 낳고 영혼을 당신과 같아지게 하신다. 그때 영혼은 그분과 함께 이해하고 그분과 함께 사랑하게 된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너무 여러 가지 일에 분주다사奔走多事 하기만 하다. 필요하고 요긴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차지하였다. 나눔 수동의 영성으로 오직 필요하고 요긴한 단 한 가지, 사랑하는 주님께서 다 하시도록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내어 맡기는 가장 좋은 몫이다. 그 사람은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하며, 하느님은 자신을 비워 온전히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신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없다. 하느님의 영원하신 진리로 분명히 말한다. 낮아지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그 모든 능력과 함께 모두 쏟아 부어주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내맡김으로써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 당신의 존재, 당신의 본성, 당신의 완전한 신성을 비워주신다.
그러므로 하려고만 한다면 하느님과 온 우주가 그대의 것이 된다. 그대 자신과 사물을 버리고, 그대의 개성이라는 옷을 벗고 그대의 신성을 입는다면 말이다. 그대는 그리스도가 되고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영원하신 말씀께서 취하지 않으실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영원하신 말씀은 개성을 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것을 모두 벗어버리고 단지 인간 본래의 모습만 남겨 두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절대적 자기 포기가 필요하다. 듣는 이와 그가 들은 것은 영원하신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대가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과 온갖 이기심을 완전히 비워내고, 완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하느님께 결합되어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겼다면 그대 안에서 태어난 모든 것은 그것이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간에 더 이상 그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대가 자신을 내맡긴 하느님께 속하게 된다.
나는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주시기를 청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정화시키고 비워주시기를 청한다. 내가 비워지면 하느님은 당신의 본성상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시게 되어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현재의 내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를 버려야 한다.” 이것은 겸손으로 이루어진다. 성 그레고리오는 “자신을 낮추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을 주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사람은 모든 일에서 의지를 하느님께 향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아무런 염려 없이 내가 옳은지 그른지 의혹을 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엑카르트는 이 설교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잃어버린 후 그를 군중 가운데서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 성전 안에서 찾았다는 이야기의 영적 의미를 논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탄생을 경험하려면 군중을 떠나 우리가 본래 왔던 그 근원과 근저根底로 되돌아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의 영혼을 “잡다하게 만드는”vermannigfaltigen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초탈만이 아들의 탄생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초탈은, 신적인 것이든 세상적인 것이든 자기 밖에서 들어오는 감각이나 관념들을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직 내면으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솟아 나와야 한다.” 이성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엑카르트는 경고한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빛나려면, 이성의 “자연적 빛”natüriches Licht은 완전히 사라지고 “순전한 무”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을 알려면, 우리의 앎은 “순수한 무지”reines Unwissen가 되어야 하고 “자기 자신과 모든 피조물들을 잊어야 한다.” 이는 전적인 어둠Finsternis이면, 그 이름은 “수용성”Empfänglichkeit이다. 하지만 이것은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수용성”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초탈은 하느님을 알고 받아들일, 하느님의 아들을 임신할empfangen 준비Bereiten로서, 하느님은 우리가 준비되자마자 즉시 “행동하시고 자신을 우리 안으로 쏟아 부어야만 한다.”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그대는 하느님이 마치 목수와 같다고 망상해서는 안 된다. 목수는 마음먹는 대로 활동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말든 자기 마음대로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그대가 준비된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활동해야만 하고 그대 안으로 자신을 쏟아 부어야만 한다. 공기가 청정하고 순수할 때 태양이 그 안으로 자기를 쏟아 부어야만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듯이, 하느님이 그대가 비고 벌거벗은 한 그대 안에 위대한 일을 하시지 않고 위대한 선을 그대 안에 부어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에게 하나의 중대한 결함일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멀리서 부를 필요가 없다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 가슴의 문에 서 계시다가 우리가 문을 열자마자 곧 들어오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갈망하는 것보다 수천 배나 그는 우리를 갈망한다. “여는 것과 들어오는 것은 동시적이다.”
초탈로 인해 우리 영혼이 텅 비어서 하느님을 감지할verspüren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은 본성상 어떤 것이 채워지지 않고 비어 있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즉 “빈 상태에서 꼼짝 말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실로 이 순간에 거기서 떠날 수 있지만, 결코 거기로 되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불교의 공空이 단순한 무無가 아니라 순수한 존재의 충만이듯, 엑카르트에게도 빔Leersein이란 하느님으로 꽉 참을 뜻한다.
엑카르트에 의하면, 우리가 마음을 여는 것과 하느님이 들어오는 것, 우리가 마음을 비우는 초탈과 하느님이 자신을 쏟아 붓는 행위는 동시적이다. 즉, 인간의 수행과 하느님의 은총이 동시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역시 “자연적 빛”인 이성의 활동이 일단 그쳐야 하느님은 초자연적 은총의 빛을 쏟아 부어주시고ergieϐen, 우리의 마음이 일단 비어야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지는 법이다. 따라서 엑카르트는 적어도 여기서는 초탈이 선행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초탈이 극한에 이를 때, 이와 동시에 하느님께서 은총을 쏟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자연이 최고조에 달할 때, 하느님은 은총을 주신다. 정신이 준비되는 동일한 순간, 하느님은 주저하거나 지체함 없이 들어오신다.”
인간은 ‘노력’보다는 ‘맡기는 법’, ‘놔두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인간됨은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며 거기에 복종하는 데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힘을 포기하고, 포기하려는 노력마저 포기하고 그저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래서 자신을 놔두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그리스도는 내 안에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 안에 형성된 주님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힘으로 보고 내 힘으로 얻으려하기 때문이다. 내 힘에 가리어 내게 이미 다 주어진 것을 보지 못하고 이미 열려 있는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힘이 다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 힘이 다한 곳에서 나는 늘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고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가치가 있고 능동적으로 무엇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동적인 인간은 게으르다고 평가될 뿐만 아니라 발전과 성공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은 능동이 지닌 한계와 좌절을 겪으면서 수동의 영성에 눈뜨게 된다.
수동의 영성은 모든 것이 자신에게 일어나게 한다. 사랑이 일어나게 하고 용서가 일어나게 하고 화해가 일어나게 한다. 이제 우리는 수동의 영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제1의 인생은 자신의 힘에 의존한 시기이고, 제2의 인생은 힘의 한계와 좌절을 체험하는 시기이고, 제3의 인생은 그 힘을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와 내적 충만을 누리는 시기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완전해지고 자비롭게 된다. 학문을 하면 배우는 게 매일 늘어나는데, 도를 닦으면 날마다 덜게 된다.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無爲에 이른다. 하는 것이 없지만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항상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 애를 써서 차지하려고 하면 천하를 얻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노자의 그리스도교적 이해(X) 중에서)
보라! 하느님은 우리를 그토록 귀여워하시고 그토록 우리에게 애원하시기 때문에, 그는 영혼이 피조물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벗어 버리기를 기다리실 수 없다. 그리고 하느님은 마치 그의 전 신성이 바로 거기에 달린 것처럼 - 실제 그렇다- 반드시 우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은 하나의 확실한 진리이며 필연적 진리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없이 살 수 없듯이 하느님도 우리 없이는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설령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다손 치더라도, 하느님은 결코 우리에게서 등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말한다: 나는 하느님께 나에게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며, 그가 나에게 무언가 주었다고 찬양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가 나로 하여금 [그를]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할 것이며, 그가 [자신을] 주어야만 하는 본성과 본질을 가진 존재임을 찬양할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이것을 빼앗으려는 자는 그에게서 그의 고유의 존재와 고유의 생명을 빼앗는 자이다.
그렇다면 이제 초탈과 은총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된 자에게 더 이상 수행이란 필요 없는 것일까? 있다면, 어떤 수행이 필요할까?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난 자에게 아직도 어떤 참회의 행위Buϐwerke가 필요한지를 묻는 물음에, 엑카르트는 금식, 철야, 기도, 고행과 같은 참회 행위들은, 육Fleisch에는 고향Heimat이요 영Geist에는 이방Fremde인 이 지상에서 가항 육을 제어하고 약한 영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라면서, “사랑의 고삐”Zaum der Liebe를 맺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육과 싸우는데 수천 배나 더 낫다고 답한다.
사랑으로써 그대는 그것(肉)을 가장 빨리 극복하며, 사랑으로써 그대는 그것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우리를 겨냥해 노린 것 가운데 사랑만한 것이 없다. 왜냐 하면 사랑은 바로 낚시꾼의 낚시와도 같기 때문이다. 낚시꾼은 고기가 낚시에 걸리기까지는 잡을 수 없다. 일단 낚시에 걸렸다 하면, 고기를 잡는 것은 보장된 일이다. 이리 꿈틀 저리 꿈틀 아무리 버둥대 봤자, 낚시꾼은 전혀 끄떡없고 고기는 빠져 나갈 수 없다.
사랑도 이와 같다고 나는 말한다. 사랑에 의해 잡힌 자는 가장 강한 사슬을 끌고 다니지만 하나의 즐거운 짐을 진 자이다. 이 달콤한 짐을 진 자는 사람들 모두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참회 행위와 고행을 통해서 보다도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는 심지어 하느님이 그에게 가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즐겁게 감내하고 견딜 수 있으며,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악을 행해도 너그럽게 용서할 수도 있다. 이 사랑의 달콤한 유대만큼 그대를 하느님께 가까이 가져다주고 하느님을 그대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없다. 이 길을 발견한 자는 다른 길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 낚시에 매달려 있는 자는 손과 발, 입, 눈, 가슴 그리고 사람이 가진 것 전부가 언제나 하느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도록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육의 힘을 이기는 데는 온갖 참회 행위나 고행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효과적이며, 사랑은 행복한 짐, 자유로운 묶임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낚시는 “걸리면 걸릴수록 더 자유롭다.”사랑이라는 낚시에는 걸리면 걸릴수록 이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사도 바오로의 수동의 영성생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 26) 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로 할 일은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현존하심에 동의하며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성령께 자신을 열어 드리는 일인 수동의 기도생활인 것이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 도시에서 북유럽 핀란드 헬싱키Finland Helsinki까지 열차 창문을 통하여 자작나무 군락群落을 바라보며 묵상한 적이 있었다. 홀로 서 있는 저 자작나무도 자기를 버릴 수 있는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내어 맡김이 아니던가? 만약 나무가 가진 잎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자작나무 껍질을 벗어버리고 생명의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작나무는 더 이상 봄의 새잎들이 부활의 소생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 기도생활이란 이 세상이란 땅 속에 뿌리를 박고 홀로 서있는 저 자작나무들 같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자기 자신을 떠나는 긴 여정의 길 위에 서있는 수동의 기도祈禱 생활하는 인간이란 상징적 비유를 바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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