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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행도 신부 munyman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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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활대축일 다음날이 되면 전국 각지의 본당과 수도회에서는 이른바 엠마오라는 것을 떠납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사순절과 성삼일 동안 전례준비와 행사준비로 고생하신 사무장님과 수녀님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본당신부님이 일체의 경비를 부담하여 야외로 놀러가는 관례적인 행사이지요. 그런데 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올해로 5년째 엠마오를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일(농어촌 선교 전담)을 맡기 전에는 본당신부로 3년 봉사했는데 워낙에 작은 시골 본당인지라 수녀님이 안계셔서 그냥 넘겨버렸고 이 일을 맡고나서는 가고 싶어도 같이 갈 사람도 없고, 또 나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해서 그냥 '방콕'에나 다녀왔습니다. 올해도 예년처럼 '방콕'에나 다녀오려다가 제 소임 중의 하나인 공소방문이나 하자 싶어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는 주소록과 지도책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거창지역에 있는 공소를 돌아볼 생각으로 집을 나섰는데 초행길이라 조금 헤맨 끝에 첫 공소를 돌아보고는 두번째 공소에 도착하니 공소회장님이 밭에 일을 나가시고 안계셨습니다. 마침 점심 때인지라 점심이나 먹으며 기다리려고 하니 회장님이 같이 먹자며 일하고 계시는 곳으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마중 나온 회장님을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밭에 도착하니 다른 신자 분도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 일하시던 형제님의 부인되시는 카타리나 자매님이 쉰 김치를 넣고 끓여 주시는 라면을 나무가지를 꺽어 만든 젖가락으로 맛있게 먹고는 고구마로 입가심을 하였습니다.
다른 공소로 안내를 하겠다며 나서시는 회장님을 따라 산길을 내려오는데 오후에 먼저 가 볼 곳이 있다며 같이 가겠느냐고 제의를 하시는 것입니다. 어디냐고 여쭈었더니 혼자 살고 계시는 박아무개 신부님을 찾아 갈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박아무개 신부님은 이십 여년 전에 어떤 일로 인해 교회를 떠나셨고 그 후로 지금까지 혼자 살고 계시는데 개인적으로는 처음 신학교를 갔을 때(저는 신학교를 두 번이나 갔습니다) 추천서를 써주신 아버지 신부님이십니다. 그동안 간간히 소식이 들려 올 때마다 한 번 찾아뵈야지 마음만 먹었을 뿐 한 번도 찾아 뵙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뜻하지도 않게 찾아 뵐 기회가 온 것입니다.
수퍼마켓에 들러 신부님이 태우신다는 담배와 간식으로 드실만한 것들을 좀 사들고는 신부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이십 여년만의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부님은 첫 눈에 저를 알아 보시고는 이미 고인이 되신 제 부모님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너무도 반갑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신부님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손수 끓여 주시는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다른 공소 방문을 위해 일어섰습니다. 방을 나오며 필요한 데 쓰시라고 비상금을 털어 드렸더니 농민회 일을 하는 사람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사양을 하셨지만 책상 한 켠에 조용히 두고는 방을 나섰습니다. 가끔씩이라도 찾아 뵙겠다는 약속을 드리고는 신부님과 작별을 하였습니다.
올해로 사제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지 칠 년째가 됩니다만 그동안의 삶을 돌아다보니 처음 가졌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벌써 타성에 젖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 한해는 잃어버린 첫 마음을 되찾는 시간으로 정하고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저에게 박신부님과의 만남은 오랫만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분들 속에 부활하신 주님도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들과의 만남이 진정한 의미의 엠마오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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