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상지원단

조회 수 3406 추천 수 0 댓글 0
Extra Form
작성자 안 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co.kr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복음성서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장차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얼마 안 되겠지요? 하고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대답은 피하시고 “얼마”라는 양적인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 즉 구원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가 훨씬 중요하다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정도를 따라 살라고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나 이 말세 같은 세상으로 미루어 천국은 반쯤 비워 있으리라고 지옥은 만원으로 흘러넘치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결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언제나 모든 말씀을 따로 떼어서가 아니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기본적인 규칙을 여기서 다시금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올 것이고,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한 상에 앉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양의 권좌(머리)를 에워싸고 모인 무수한 무리들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실 아주 현실적인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하는 것을 따라 한다면, 즉 편안하고 넓은 길을 걷는다면 그 순간은 편하고 안전 하겠지만, 그 길을 가면 갈수록 진정한 생명으로부터는 멀어진다는 것이지요. 이로써 힘들고 좁은 길을 걷고 힘들여 좁은 문을 빠져나가기로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결정이란 말씀을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방의 특징이랄 수 있는 강렬함이 담긴 비유를 보게 되는데, 우리의 일상 행동거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규칙을 설정해 줍니다. 그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 다른 사람들에 휩쓸려 부화뇌동 하는 것, 물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 헤엄치는 것은 곧 우리를 계속해서 일반 무리들 속으로 끌어들이고, 소비시대에 상품화 비인간화 되고, 그럼으로써 결국은 공허 속으로 끌어가게 된다고 지적하여 말씀하십니다.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용기와 실천하려는 노력, 도전과 모험의 정도의 좁은 길 이것만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줍니다.
이 세상만사와 시간은 하느님에게서 받았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완성되고 영원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을 지나쳐 가는 세상만사나 시간은 그저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말합니다. 지상의 시간을 팔아 천상의 시간을 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진 목자는 도둑이나 강도와 달리 문으로 들어가서 양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바로 그 문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문입니다. 나를 통해 들어오면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고 드나들며 목초를 찾아 얻을 것입니다”(요한 10,9). 예수님은 우리가 참된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문이 되려 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받고 무사하고 안전하며 자기 자신을 찾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자신을 만나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문은 열리고 닫힙니다. 이 문을 통해 나는 내면으로, 내면의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합니다. 안에서도 살고 밖에서도 사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안에서만 사는 사람은 외부세계를 차단한 채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또 밖에서만 사는 사람은 피상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습니다. 안팎으로 드나들어야 생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문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내면에 들어오셔서 바깥세상에 나가 세상을 만들고 가꾸라고 우리의 등을 떠미십니다. 예수님은 문이시며 우리는 이 문을 통해서 우리 자신 속으로 하느님이 계신 거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좁은 문은 으뜸계명 사랑의 계명같이 온전한 마음과 모든 힘과 모든 뜻으로 하는 최선을 다하는 힘든 십자가 사랑의 여정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께서 마시옵소서! 넓고 쉬운 길 세상 많은 이들이 사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자고 예수님을 붙잡고 만류하기까지 이르른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어찌하여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느냐고 단호하게 내치셨던 것입니다.
좁은 문에 이르는 길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원하신 자신의 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을 발견한다면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 우리 인간의 삶의 의미가 충만해져서 영육 간에 건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남들처럼 잘살고 돈벌이에 성공하는 것밖에 인생에서 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넘어서는 보다 큰 의미와 보담과 희망이 없기 때문에 실의와 절망이라는 죽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자와 길 잃은 여행자라는 묵상을 우리 함께 하십시다.
옛날에 어떤 성자가 성지를 항해 순례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울창한 숲 속을 지나가다가, 밀림 속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몇 날 며칠 동안 숲을 빠져나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이 길로도 가보고 저 길로도 가 보았으며, 사방팔방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헤매고 다니며 다닐수록 점점 더 밀림 한가운데로 깊이 들어갈 뿐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여전히 숲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던 그는, 우연히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몇 명의 여행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 역시 순례 여행을 떠났다가 그 숲에서 길을 잃고 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자를 발견하자마자 기쁨에 넘쳐 소리쳤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성자는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그는 우리를 이 곤경으로부터 구출해 줄 테니까요.” 이어서 그들은 성자를 향해 애원했습니다. “성자님,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제발 우리가 여기서 죽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성자가 대답 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원하시는 길을 인도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 역시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는 중이니까요. 나는 오히려 숲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좁은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나와 함께 자유와 구원에로 이르는 길을 찾아봅시다. 우리 모두는 독같이 자유의 길을 찾고 있으니까요.”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사막의 수도승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홀로 “암자”를 짓고 은거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끊어버렸습니다. 다만 홀로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만남으로써 자기 자신과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면의 어두움을 보았고 악령처럼 날뛰는 무의식의 힘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이들과 용감히 싸워 이겼습니다. 그리하여 정화된 영혼, 신비에 취하고 하느님에 흠뻑 빠진 사람들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들이 몸소 실천하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성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자기수련이란 좁은 문을 통한 자기 안에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성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째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밖으로 쫓겨나고 사방에서 모여온 이방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 상에 둘러앉는가? 그릇된 선민의식으로 자족하며 구원을 확신해 온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일뿐입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뜻밖의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좁은 길의 고난을 은혜로운 견책으로 알아 감수 인내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진정한 선민입니다.
참된 행복 가치관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막의 은수 수도자들 같이 하느님 나라에서 모든 가치가 되살아나서 이 세상에서 꼴찌가 첫째가 되는 하느님 나라의 반전이야말로 좁은 등용문으로 들어선 자들만의 영원한 개선인 것입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들어 갈 수 없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작성자
공지 가톨릭 마산교구 주보 _ 2024년 4월 28일 부활 제5주일 __ 향심기도란 어떤 기도인가요? (4) 2024.04.28 5 윤행도 가롤로 신부/ 월영본당 주임
218 사순 제1주일 - 유혹과 대항한다는 것은 2013.03.14 3947 안충석 루까 신부
217 사순 제2주일-주의 변모 축일 2013.03.14 3833 안충석 루까 신부
216 사순 제1주일 - 유혹과 대항한다는 것은 2022.03.06 84 안충석 루까 신부
215 사순 제3주일-성전 정화사건 2013.03.14 4113 안충석 루까 신부
214 사순 제2주일 - 주님의 거룩한 변모 2022.03.13 91 안충석 루까 신부
213 사순 제4주일 -예수 수난의 正道 2013.03.14 3939 안충석 루까 신부
212 연중 제30주일 2013.03.14 3416 안충석 루까 신부
211 사순 제3주일 - 성전 정화사건 2022.03.20 170 안충석 루까 신부
210 사순 제4주일 – 수난의 정도(正道) 2022.03.27 96 안충석 루까 신부
209 연중 제5주일 2014.02.08 3143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67@hanmail.net>
208 연중 제22주일 묵상 - 주님의 거룩한 변모(1) 2013.03.14 3546 안 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co.kr
207 연중 제 18주일 - 청원기도 생활 2013.03.14 4769 안 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co.kr
206 연중 제23주일 묵상 - 주님의 변모를 이루는 ..(II) 2013.03.14 3115 안 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co.kr
205 연중 제 19주일 - 깨어 기다리는 기도 2013.03.14 3176 안 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co.kr
204 연중 제24주일 묵상 - 기도생활 2013.03.14 3297 안 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co.kr
203 연중 제 20주일 - 기도는 사랑의 열망의 불을 당긴다. 2013.03.14 3384 안 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co.kr
202 연중 제25주일 묵상 - 기도할 때 하느님 말씀의 역할 2013.03.14 3969 안 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co.kr
» 연중 제 21주일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2013.03.14 3406 안 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co.kr
200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13.03.23 4649 성공회 변승철 요한 신부 yuleum@hanmail.net
199 예수 부활 대축일 2013.03.30 4125 성공회 변승철 요한 신부 yuleum@hanmail.net
목록
Board Pagination ‹ Prev 1 ...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Next ›
/ 56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