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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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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 나아가는 이는 모두 승리를 위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나 승리자는 한 사람뿐이듯이 우리는 그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덕행을 닦으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 말씀을 올림픽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 모습에서 저는 묵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스포츠는 세계 1류,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라는 시평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성서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시는 가운데서 베드로가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 거기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대한 고백을 하는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성립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장엄한 표현 방식으로 세 번 되풀이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선 첫째로 인간적인 요소 안에 나타나는 베드로, 그 다음에 18절에서 그 베드로 봉헌 후에 교회를 세운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하느님 나라와의 관계가 이 교회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는 하느님 나라와의 관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중요한 역할, 모습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인간적인 교회지만 그 교회는 바로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지어 놓은 것과 자립해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으로부터의 고백을 들은 후에 베드로가 교만해 진다거나 또는 자기 자신의 위치에 안주해서 마음을 놓는 일이 없도록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비판의 말씀이 계십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서 그 당시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군중들이나 헤로데 왕이나 나자렛 사람들뿐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가장 측근자였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베드로는 놀라면서 “그것은 안 됩니다” 하면서 펄쩍 뛰는 것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의 태도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혹, 세 번째 유혹에서 응답하시는 똑같은 식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옛날 유혹을 물리치셨을 때의 이유와 똑같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생각이 아니라 너 자신의 생각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가는 길이라는 것은 그저 단순하게 항상 성공해 가면서 쉽게 넘어가는 길은 아니라는 것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 대답은 아마 마태오 교회의 전례적 사도신경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언어를 당신의 언어로 풀이하시자 베드로는 금방 당황합니다. 자신의 언어로 이해한 그리스도 상과 예수께서 당신의 언어로 설명하시는 그리스도 상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하는 상태는 우리의 상태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사도 신앙을 매 주일미사 때마다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으로 무엇이 고백되고 있는지는 베드로처럼 모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가 몰랐던 사실, 즉 그리스도는 죽고 부활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베드로보다는 더 나운 모범 답안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 우리가 작성한 그 모범 답안대로, 그런 방식으로 죽고 부활하셨을까? 우리가 모범 답안을 낸다 하면서도 실제 예수님의 부활과는 상관없는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지금 어떤 언어로 그리스도께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베드로 같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의 사건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에서만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는 그저 단순하게 좋은 일만 나의 소원 성취만을 이루어 달라는 기복 신앙뿐 입니까?
제베대오의 어머니 같이 예수님께 자기 두 아들들을 하늘나라에 좋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권력과 금력으로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행세하게 해 달라는 영광주의 신앙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태 16, 24)
무엇보다도 자기버림에 대한 말씀이 자기 부정, 자해, 자기 비하 등으로 종종 왜곡되게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어 아파르네이스타이(aparneisthai)는 “‘아니오’라고 말하다, 거절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신적인 것까지 소유하고 싶어 하는 영혼의 자기중심적 성향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난을 제외시키고 싶어 했던 바로 앞 장면에서 볼 때, 예수의 말씀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소유해서도 안 되고, 항상 “잘되고” 행복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 에고와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신비가들은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에고를 위해 강요하려는 사람은 하느님을 오용하는 것이고 진정한 하느님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에고 나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열정을 죽여야만 되는 것처럼 예수의 말씀을 금욕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관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고 점유하고 싶어 하며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싶어 하는 우리 안의 성향,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하느님까지 자기를 위해 끌어내리려는 우리 안의 성향에 대해 내적인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작은 자아에 집착해 있는 사람에게는 오직 “불안에 찬 자기 보존”(Drewermann)만이 관건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마음이 넓어지고, 나약한 자아를 하느님께 내드립니다. 진정한 하느님 체험은 우리가 에고 나 자신을 떨쳐 버려야만 가능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작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등장한 장면입니다. 어느 교회에 주임신부격인 제사장이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대심문관에게 가서 큰일 났습니다. 저의 교회에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하고 고발하니까 그 대심문관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어 버려서 더 이상 우리 교회에 나타나지 않게 하라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 제사장은 교회에 가서 예수님께 제발 가만히 뒤에 숨어 계시고, 나타나서 나서지 않으시면 우리들이 우리방식대로 주님을 잘 모실 터이니 우리 교회를 떠나 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심판을 한 대심문관은 매일 수백 명의 이단들을 처형 하느라고 아흔 살의 노구에 쉴 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심문관은 어느 날 밤 자신의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쳐댑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유스러운 판단이나 사랑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할 신앙의 신비요. 나는 내일 당신을 처형할 것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대심문관은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이용하고 용도폐기 처분하여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도 매 주일미사 때마다 베드로 같이 스승님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십니다. 라고 사도신경을 고백하고는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이 행하는 바를 모르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십자가 사형수로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를 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 자체로 고백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배반 배신, 악보다도 더 큰 사랑과 선이 이긴다는 우리 신앙생활로 말입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의 영웅들, 메달리스트 같이 우리 각자 자신도 자기 완덕의 목표 달성을 위하여 저마다 경기장을 달리고 있다고 사도 바오로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 다 메달의 주인공의 영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중에 한두 명 몇 명만 그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 정도로 최선을 다하여 자기완성 완덕을 닦아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역도의 천하장사 장미란 선수의 모습과 표정에서 사도 바오로의 지적 말씀이 떠오를 정도로 묵상한 것입니다.
장미란 선수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성장 그의 훈련 수십 년 동안 연습한 결과 이미 연습 때 수십 번 수백, 수천 번 수만 번 들어 올린 것을 들어 올린 것뿐이란 듯이 말입니다.
다시 세계 신기록에 도전하기를 시작하겠다는 그의 훈련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덕행을 닦는 경지라고 말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도 매주일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실천인 일상생활에 훈련으로 덕행을 닦아서 사도 바오로같이 신앙고백을 하십시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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