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상지원단

2013.03.14 21:46

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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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방식 목사 bsot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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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
예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너무나 귀한 은총인데 우리를 친구로 불러 주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우신 은총인가!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다양한 이미지와 상징들이 나타난다. 부모와 자녀, 신랑과 신부, 왕과 백성, 목자와 양 등. 이런 다양한 이미지들 가운데서도 벗은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이미지중의 하나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였으며 모세는 친구를 대면하듯이 하나님을 대면하였다고 증거 한다. 무엇보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와 늘 동행하시며 영생의 떡을 떼어 주시는 영원한 벗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벗으로 부르심을 받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주님이 우리를 종이 아닌 벗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무엇보다 동등하게 나누는 관계(equal exchange), 즉 우리와 상호성(mutuality)을 가진 관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이미지는 아마도 부모와 자녀 간의 이미지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와 같은 존재이고 우리는 그 분의 영원한 자녀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부모자녀 관계 이미지로만 고착되어 버리면 거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초래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이미지에서 부모는 성인이고 자녀는 아직 부모로부터 보호와 돌봄을 받아야만 하는 어린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 관계가 일방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미지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동등하게 나누는 상호적인 관계(equal exchange)가 아닌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과 동시에 장성한 분량을 가진 성인의 믿음으로 자라나야 하는 존재들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란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적인 우애와 뜻을 나누는 관계이다. 심지어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관계임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친구관계란 둘 사이의 관계의 증진이나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수동적 자세로만이 아닌 주도성을 가지고 관계에 적극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 관계와 달리 종은 언제나 주인의 명령에 순종할 뿐이다. 종은 어떤 일을 자발적으로 생각해서 주도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거나 추진할 수 없다. 항상 파악된 주인의 의도에 따라 그것을 어떤 빈틈이나 착오가 없이 수행하는 것이 바로 종의 삶인 것이다. 반면에 친구는 자신의 의도와 뜻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다. 랍비들이 쓴 글을 모아놓은 미드라쉬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노아의 믿음을 비교해 놓은 흥미로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의 믿음을 보여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두 사람을 비교한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던(walk with) 인물이었다(창6:9).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걷는 자였다(Walk before me and be blameless). 노아와 아브라함 둘 다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노아의 동행은 하나님과 함께(walk) 걷는 자의 신앙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before) 걷는 자의 신앙으로 묘사된다. 랍비들은 이 동행의 차이를 주목한다. 노아의 믿음이란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온 인류가 파멸하는 홍수의 대 재난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만 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믿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길을 개척하는(before) 어른의 신앙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앞에서 그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하나님께 강력하게 자신의 뜻을 드러낸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담대한 진언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함으로 가능했다라고 랍비들은 해석한다.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른의 믿음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로 살아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의 우정이 어떻게 친구로 자라게 되는지 그 과정을 알아보자. 어떻게 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인의 관계로 자나날 수 있겠는가? 성숙하고 상호적인 친구 관계로 자라려면 우선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존재와 열망과 생각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참된 존재인식은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으므로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히 알 수 있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른다면 어떻게 상호적인 인격적 관계를 다른 존재와 맺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애쓰면서 우리는 또한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열망과 뜻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마음과 그 분의 뜻에 우리 자신을 일치 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가 알아가는 주님의 사랑과 그 분의 뜻은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알아가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숨겨진 동기와 열망들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 우리가 우리의 숨겨진 동기와 열망, 이기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주님 안에서 보고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을 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도 그 내려놓음이나 절대적인 순종을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에게 커다란 자유와 공간을 허락해 주시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자유의 공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넘어짐을 경험했었는가? 그 공간 속에서 넘어지고 또 쓰러지고 좌절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보다 잘 알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자라나는 것을 발견한다. 마침내 우리의 우정이 주님의 말씀처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생명의 관계로까지 자라나리라 믿는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주는 관계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주셨듯이 우리도 친구 되신 주님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내어주는 관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듯이 우리의 모든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다 내어주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이 참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완전한 공간과 자유를 허락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님의 수난의 길을 가로막고 섰던 베드로처럼 친구에게 자신이 원하는 길을 고집하거나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강요가 없다. 이것은 사랑하는 친구가 온전히 참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무한한 공간을 허락해 주는 것이다. 친구 자신의 참된 열망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지지할 뿐이다. 이로써 친구의 열망이 나의 열망이요 나의 열망이 친구의 열망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둘은 서로 독립된 인격체들로 살아가지만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의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소망하는 우리와의 관계가 바로 이러한 벗으로의 부르심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본다.
사실 주님이 초청하시는 벗으로의 관계를 잠시 묵상해보았지만 어찌 이것을 말로 다 쓸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나의 벗이 된다는 것이 어디 상상이나 되며 어찌 그것을 사람의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이러한 벗으로의 관계로 자라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아마도 우리가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벗으로 살아가기를 시작할 때 우리는 이 관계가 주는 참다운 은혜와 그 관계의 깊이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리라 본다. 이러한 주님과의 벗의 관계에 기초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맺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성숙한 벗의 관계들로 자라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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