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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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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정국에도 봄은 오는가?

지난 한주간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잃었던 아들의 비유 장면은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죄인들에 대한 생각을 바꿀 것을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주인공인 아버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세번째는 이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태도를 보고 군중들과 죄인들이 모이듯이 우리 자신들도 회개생활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제 몫을 챙겨 희망과 기대에 날뛰던 작은 아들이 그가 섬기던 돈과 우상들이 떠난 후 돼지 우리 안에서 짐승같이 지내는 모습을 관상하노라면, 금전 만능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우리 자신의 내적 공허를 느끼며 접할 수 있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고결하고 고상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절망감에 찌들린 까닭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위안을 주는 진리입니다. 아버지가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들인 것은 아들이 고결해서도, 집에 돌아온 동기가 순수해서도 아니고, 그가 당신의 아들이며 그저 집으로 돌아와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의 공허를 하느님 앞에서 자인하는 일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하느님은 뛰어서 마중 나오십니다. 이 진리를 한참 동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 뵙기에 앞서 자기를 내세우며 하느님의 선하심보다 자신의 탓을 생각하는 데 주력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있어 하느님이 하느님 되시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봉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 진리가 바로 지금 그대 안에서 체현(體現)되고 있다는 사실, 너무나 좋아서 아버지가 그대를 부둥켜안고 입맞추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십시오. 이 진리로 그대의 불신이 깨어져서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아버지께 속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 가르침은 주인공 아버지로 비유된 하느님 아버지께서 잃었던 작은 아들을 당신의 아들이란 존재 그 자체로만, 죄지은 상태의 현실 그대로 그의 진가를 발견하고 받아들여 주시는, 아버지의 호탕한 부성이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 같이 환영받을 자격 유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는 것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을 맞는 기쁨의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잃었던 아들에 대해 그 아버지는 '내 아들'이라는 그 자체 만으로 아들의 자격을 자포자기했던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줌으로써 다시 아들의 자격을 세워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작은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실 것이라는 아버지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에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이 우리의 회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항복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참된 회개생활이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 같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을 환영하고 어울려 식사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과 같이, 밭에 나가있던 큰 아들은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한 나머지 아버지와 동생을 일컬어 남 대하듯이 "당신과 당신의 아들"이라는 표현까지 씁니다. 형은 자신의 힘겨운 노고와 충실한 봉사를 익히 알고 있고, 따라서 자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누구든 경멸하고 자기보다 나약하거나 불성실한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면 언제고 화를 내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의 보물은 그의 실생활에서 예증되듯이 자신의 선함 속에 묻혀 있으며, 따라서 또 다른 선은 조금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눈 먼 자로 묘사하시는 바리사이의 태도를 전형적으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의 눈 먼 오만을 긴 말로 나무라지 않고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라고만 타이르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지금 내게 들려주고 계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 '냉담자 회두', '거주 미상자 찾기 운동', '가두선교' 등은 일시적인 효과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종교심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것은 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과 교회는 그들을 잃어버린 탕자(루가 15, 11-32)로만 생각하면서, 그들이 마음을 돌려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그들을 탕자로 생각하는 신도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이 큰 아들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탕자로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만 큰 아들이 되는 것은 더욱 원치 않으십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인자한 아버지보다는 자칫 제도의 아버지로 대할 우려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는 둘째를 내보내고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버지는 하루도 쉬지 않고 대문 밖에 나와 마음을 열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입니다. 이 애처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어쩌면 둘째가 세속에 찌들어 몸이 엉망이 되었을 때 그의 종교심이 되살아나게 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둘째가 아버지의 이 마음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는 다른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제도를 떠난 그를 받아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의 종교심의 고향이었을 것입니다. 늘 집(교회) 대문을 나와 언덕에 올라 둘째를 기다리는 아버지가 드디어 저 멀리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집을 더욱 벗어나 아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집(교의)만을 지키는 완고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집안과 밖을 넘나드는 아버지의 자유, 성과 속의 일치를 이룬 아버지의 모습, 그것이 우리 자신과 교회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한 작은 아들에 대하여 기뻐하지 못하는 큰 아들의 잘못은 아버지의 차고 흘러 넘치는 풍요한 부성애가 그를 떠나 재산을 탕진하고 자신의 지혜만 생각하는 동생에게도 미칠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의 위력은 작은 아들의 죄의 정도에서는 무력해야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죄인의 회개로부터 진정 어떤 기쁨을 느끼는지 물어야겠습니다. (그런 기쁨을 찾으려고나 하는지 모릅니다.) 죄인은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까지도 인류가 하나 되는 데 아무 힘도 못쓴다는 것을, 예수님이 그래서 죄인과 어울리는 것을 트집잡습니다. 죄인의 회개를 진정 기뻐한다면, 또 그런 질(質)좋은 기쁨을 누리려 한다면 즉시 우리 자신이 회개하면 됩니다. 하느님이 세워주신 고향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트집잡거나 화내지 말고 죄인 하나의 회개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예수님은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라고 당신의 마음을 말씀하신다. "그런 사람일지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에제 18, 23).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노라." 오늘 복음에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고 타이르며 달래셨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이 아버지의 타이르심과 달래심을 듣고 자기 집에 들여 잔치 상에 함께 하는 기쁨을 누렸다는 내용이 없다는 데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우리 각자 자기 자신들도 마치 큰 아들 같이 진정한 회개생활로 다시 찾은 하느님 나라를 사는 기쁨과 즐거움은 각자 자기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복음 사가의 의도와 전언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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