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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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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십자가 길같은 꽃샘추위가 있었던 지난 한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 복음의 변모사건은 나자렛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 사건으로써, 장차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십자가의 길, 추문, 그리고 치욕의 십자가상 죽음이 부활의 영광이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파스카 신앙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썩고 죽는 고통의 과정을 거치면 수십 배, 수백 배의 새 생명으로 변모되는 영광을 보겠지만, 그러한 고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는다는 것은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는 사도 베드로의 만류와 같은 식입니다. , 예수님의 변모사건은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장차 차지할 영광을 잠시 체험하게 하심으로써 고난을 겪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주시기 위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랑의 능력인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기도 생활 가운데서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변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세계와 인간의 모든 것을 변모시키시는 과정으로서 구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왔다는 말씀대로 우리 기도생활도 그의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엑카르트 신비 신학자는 우리 존재의 근저가 신의 근저(Gottesgrund)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야 비로소 참다운 생명과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엑카르트가 바라는 하느님은 결코 인간 밖에 존재하는 타자로서의 신, 대상적 신, 내가 필요에 따라 "소유"하고 버릴 수 있는 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Sein)로서의 신, 내 안의 신, 나 자신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운 신, 나의 참 자아로서의 신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 할 신이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거나 보아서는 안되고, 자신의 것, 그리고 자신의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신을 위해서든, 혹은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든, 혹은 자기 밖의 그 어떤 것을 위해서든, 어떤 목적을 위해서 섬기거나 일해서는 안 되고 오직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만 섬기고 일해야 합니다. 엑카르트는 타자로서의 하느님, 인간을 지배하거나 소외시키는 신을 거부합니다. 엑카르트의 "종교적 무신론"은 인간을 억압하고 비굴하게 만드는 권위적 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어떠한 종교적 권위나 억압에도 굴할 필요가 없는 참 인간, 주인이요 주체로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누추하고 비굴한 종이 아니라 당당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부족한 것이 없으며 빌 것도 없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예수 변모사건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 우리 자신도 거룩히 빛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변모될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신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도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관계 회로에 일치할 때 예수님의 변모 같이 가장 큰 변모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베드로같이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는 식으로 십자가 고통이라는 정도(正道)의 과정없이 부활의 영광만을 차지하려 한다면 우리는 악마같이 변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만으로, 사람의 특정한 방식으로만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그 방식을 얻고 기기에 가려진 하느님은 놓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생명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이유없이 '있는 자'로서 사시는 존재 그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이유가 있는 일은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일이나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의 대상자와 동일시하심으로써, 그 사랑하는 인간의 삶과 죄악의 십자가를 선택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살이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살면서 우리는 깊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나 미사를 통해 혹은 다른 계기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맛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만남과 은총의 체험은 제자도의 실천을 위한 밑거름일 뿐입니다. 그 체험 안에만 머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체험의 기쁨에서 나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제자됨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변모가 나에게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같은 하느님 사랑의 체험으로 우리 신앙생활의 십자가의 길이 부활, 영광의 변모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과 하나가 되어 사랑하게 되면 힘이 들지 않지만, 내가 사랑을 해야만 할 때는 힘이 듭니다. 앞의 경우는 무위로 하고 뒤의 경우는 인위로 하기 때문입니다. 허리띠가 허리에 맞으면 허리띠가 있다는 것이 잊혀지듯이, 무위로 할 때는 나 자신과 내가 하는 행위가 하나가 되어 잊혀지기에 해야 할 모든 것을 하고도 스스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나오는 의인들의 행위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립 4, 13)라고 말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무위가 되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위로써 하면 막힘이 없고, 행한 것이 없는 데도 모든 것을 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39)라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위'이며 '완전한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 두 제자에게 지적하신 사랑하는 자의 삶, 죄와 벌, 보속과 고통을 함께 지고 가시는 일방적 사랑의 고난의 정도(正道)의 길 밖에 다른 왕도(王道)가 없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히려 어떤 존재의 사람이며 어떤 마음의 방향, 지향과 자세와 방식으로 행위를 하느냐가 우리 자신의 변모가 결정된다고 에카르트 신비학자는 갈파하셨습니다. 행위가 우리를 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성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을 맺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거룩한 변모도 없습니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는 정치와 경제의 유착으로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하여 정도가 아닌 술수와 악신의 수단과 방법인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의 고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습을 끊느냐 못끊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국민 각자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정치개혁이니, 안정이니, 통합이니 하는 것도 인간자신(人間自身)이 하는 것이니, 인간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라면 개혁은 시작도 못한 것입니다. 외적인 행위가 아무리 크고 위대해도 내적 행위의 도덕성의 선함을 조금도 증가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사랑의 십자가 길없이 다른 사람에게 늑대나 악마도 변모되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려는 데서, 온전한 회개생활을 통해 사랑의 십자가 길로 들어서는 과정을 반드시 거침으로써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영광을 차지하는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기 전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1만 가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9천 가지가 있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1천 가지를 후회하며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도 내게 가능한 9천 가지를 하면서 살수도 있다. 선택은 내게 달려 있다.' - 잭 켄필드 -


'이때에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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