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상지원단

2014.03.09 17:20

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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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행도 가롤로 신부 <munyman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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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不惑)

 

일찍이 공자님이 말씀하시길 나이 40을 불혹, 즉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나이 40은 불혹이 아니라 유혹이었고 미혹(마음이 흐려지도록 무엇에 홀림)이었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아홉에 사제서품을 받고 사제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니 거의 불혹의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한 셈입니다. 순진했던 것인지 멍청했던 것인지 저는 불혹이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고 사제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닥쳐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부임 첫날부터 제법 비싼 음식이 나오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고 일주일에 몇 번씩 초대받는 식사자리도 만만치 않은 식당이었습니다. 명절이나 영명일에 주시는 선물들도 하나같이 값비싼 것이었고 차축복이나 집축복을 해드리고 나면 으레히 감사인사가 담긴 봉투가 뒤따랐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윗자리를 배정받았고 사회적 지위나 나이를 떠나 모든 분들이 저를 존대해 주었습니다. 제가 좀 허튼소리를 해도 옳은 말이라며 맞장구를 쳐주었고 저의 주장을 좀 강하게 펼치면 모두들 입을 닫고 듣기만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황송했고 때로는 당황스러웠고 때로는 죄송스럽기까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한 것이 되더니 어느새 은근히 그런 것들을 바라고 기다리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그러니까 세속의 나이로 서른즈음에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안전과 생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애정과 존중), 악마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힘과 통제)을 받으셨습니다. 나이 서른이면 뜻을 세운다는 의미의 立志이지만 이미 어른이 된 나이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받으셨던 세 가지 유혹은 평생을 따라 다닌다는 의미입니다.

올해로 제 나이가 오십 넷이 되었습니다. 나이 오십을 하늘의 뜻을 안다고 하여 知天命이라고 하지만 저는 하늘의 뜻은커녕 땅의 뜻도 아니 사람의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아직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제 마음이 세상의 것들에 의해 이리저리 쉼 없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서른의 나이에 이미 불혹이셨고, 지천명이셨으며,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이순이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불경스럽게도) 애늙은이였기 때문이었을까요?

광야로 나가실 때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고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실 때도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서른둘의 나이로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당시 교무처장이셨던 안아무개 신부님(현 마산교구장 주교님)이 “행도야!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셨던 연세가 몇 세인지 알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 제 모습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행도야! 너 언제 철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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