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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호 목사 <yiss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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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역설의 뱃속에서

(예레20,7~13; 마태10,34~39)

 

지난 금요일에 부산에서 어떤 모임을 갖고, 오후에 약 두 시간 정도 이해인 수녀님을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고는 시 한편을 읽어 주셨습니다. “행복의 얼굴이라는 시입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고통이 없다는 뜻은 정말 아닙니다// 마음 문 활짝 열면/ 행복은 천개의 얼굴로/ 아니 무한대로 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어디에 숨어있다/ 고운 날개 달고/ 살짝 나타날지 모르는 나의 행복/ 행복과 숨바꼭질하는/ 설렘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오늘도 행복합니다.

저는 이 시의 첫 번째 두 번째 연이 깊이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고통이 없다는 뜻은 정말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믿는 자의 삶의 역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그 속에 행복이 없는 것은 아니고, 또 행복하다고 해서 그 속에 고통이 없다는 뜻은 정말 아닙니다.

요나처럼, 나도 역설의 뱃속에서 내 운명을 향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고 했던 머튼처럼, 우리도 하느님이 마련하신 물고기 뱃속에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향한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있는 물고기 뱃속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그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데려다 놓을 줄을 안다면, 하느님의 손길을 신뢰한다면, 다시 정신을 차려 우리의 삶을 사랑스럽게 챙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자서전적인 글입니다. 이런 성격의 글은 예레미야서 속에만 자주 등장하는 성격의 글인데, 성서학자들은 이런 부분을 예레미야 고백록이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자신이 자신의 내적인 고통들 때문에 탄식하는 본문들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파멸하는 이스라엘에게 더욱 철저한 파멸을 선포했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적인 갈등이 매우 컸습니다. 예언자란 기계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역사에서 경험한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민족의 파멸을 보면서 더 철저한 파멸을 선포한다는 것은 내적으로 큰 고통을 겪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런 행위들은 매국적인 행위로 비춰질 수밖에 없어서, 밖에서 오는 핍박이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지금은 평화야, 평화야, 샬롬 샬롬 하고 있는데, 예레미야 혼자서 평화가 아니다, 평화가 아니다, 로 샬롬, 로 샬롬 하고 있으니, 예레미야가 안팎으로 당한 괴로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토로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이 문장은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 강하게 실려 문장입니다.

유대인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 밝힌 대로, 꾀다라는 단어 파타는 히브리어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결혼 전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유혹할 때 혹은 후릴 때 쓰는 단어입니다. 다음 구절, “압도하다라는 단어 하자크는 여자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경우인데, “강간하다” “성폭행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들은 구약성경 레위기의 법전에서 주로 남녀 간의 성 문제 때 등장하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주님 주님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폭행하셔서 내가 당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자신이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전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역설의 말씀이었습니다. 망해가는 나라에 대해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쳐야 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일로 사람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결심하면,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자신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까지 타들어가니 견딜 수가 없어 주님께 항복하고 맙니다. 이런 중에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넘어지고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다의 다른 사람은 차지하더라도, 예레미야 자신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 왔다”(마태10,34),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0,39)라는 역설의 뱃속에 삼켜진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역설에, 십자가의 역설에 삼켜진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자신을 그에게 온전히 맡깁니다. 작은 자기가 죽고 더 큰 자기로 사는 그 역설을 그는 몸소 몸으로 체험합니다. 죽어야 산다는 역설을 짊어지고 그는 자신의 길을 갑니다. 마침내 그는 예레미야의 작은 위로의 책”(30~33)에서 그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의 집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겠다.... 내가 전에 그들을 뽑아내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고 재앙에 빠뜨리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았으나, 이제는 내가 그들을 세우고 심으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겠다.”(예레31,27-28))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런 신앙의 영웅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도 작은 일상의 삶에서, 네가 죽어라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작은 네가 죽고 큰 너로 살아라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의 작은 죽음은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평소 거슬리는 말들을 대범하게 넘기기, 창피하고 속된 말로 쪽팔리는 일들을 그냥 감수해 보기, 자존심 상하는 일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보기,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사람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판단하고 비난하던 것들을 보류해 보기, 하면 좋은데 하기 싫었던 일들을 눈 딱 감고 해보기, 자신의 부족한 삶을 사랑으로 안아주기... 등등입니다.

우리의 삶은 신비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은 신비한 후광이나 오로라로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역설이라는 의미에서 신비입니다. 작은 내가 죽으면 큰 내가 사는 신비, 그 역설이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삶의 길입니다. 역설의 뱃속에서 비록 지금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고, 캄캄하고 답답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삶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작은 나를 떠나 큰 나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받아들여 보십시오. 그러면 그 속에서의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절망과 비탄 속에, 저주 속에 빠뜨리려는 계획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번영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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