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상지원단

2013.03.14 21:00

연중 제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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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토마스 키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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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내주하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의식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닌 약간의 형이상학적 지식은 매 순간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창조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창조란 최소의 미립자에서 가장 높은 의식 수준까지 모든 단계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지속적인 선물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하는 데 따르는 모든 어려움은 우리가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기도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은 초기 유년기에서부터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전반적으로 두루 스며들어 있다. 이 확신은 우리가 복음 말씀에 이끌려 영적 여정을 시작하지 않는 한 성장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영적 여정이란 하느님이 멀리 계신다거나 안 계신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특별한 청을 들어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확신을 더 강하게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감성의 판단에 근거한 비이성적인 태도이다. 불행하게도 통제되지 않는 우리의 감정들은 이성과 의지에 복종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은 그 자체로 원동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이성과 의지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좌지우지 한다. 만일 우리의 계획이 좋거나 싫거나 하는 감정의 인지와 대립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영적 여정의 시작에서 끝까지 모든 과정들은 언제나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영적 여정이 진보함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더 인식하게 된다. 유년기에서 벗어나 충분히 성찰할 수 있는 자의식이 생기면서 어떻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지에 대한 개념은 대체로 모호하고 원시적이 되어간다. 영적 여정은 신적인 실체divine reality와 우리의 정서적이고 지성적이며 신체적인 관계를 점차 넓혀가는 과정이다. 그 신적 실체는 우리 안에 현존하지만 보통 우리의 정서와 개념으로는 잡을 수 없다.
삼위일체 교리는 세 신적인 위격 안에 계시는 한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다. 첫 번째 위격은 아버지, 두 번째 위격은 말씀, 세 번째 위격은 성령이라 하는데, 성령은 숨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말씀이라고 하는 분이나 숨이라고 하는 분을 알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느님의 위격의 개념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인간관계의 유비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사람들이 현존하는 방식으로 기대해서는 결코 안 된다. 구약성경 영성의 최고 열매는 오랜 기간 교육을 통해 맺어진 것이다. 즉, 선택된 민족이 점차적으로 그들의 하느님이 다른 근동 지역의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라는 좁은 개념에서 벗어나 초월자로서의 하느님 개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인류를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선물은 유일하신 하느님이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현존하시지만, 우리가 오로지 감각과 느낌에 근거한 판단과 선입견을 갖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영적 여정의 신학적 근본 원리는 하느님의 내주하심divine indwelling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의 원천이 되신다. 가장 육체적인 것에서 가장 영적인 것에 이르는 삶의 모든 차원은 하느님의 현존에 의해서 지탱된다.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생각으로 전례에 참석하거나 기도하러 간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우리의 육체적이고 지적이고 영적인 활동을 지탱하는 에너지로서 현존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원천에 다시 뿌리를 내려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또 그분은 신적인 에너지가 한없이 온화하고, 연민 가득하고, 끝없이 양육하고, 무한한 능력과 힘을 준다는 것을 체험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예수님은 성부를 압바로 체험하셨다. 그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 특별히 인간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자애이다. 예수님의 하느님 체험은 그 당시 종교적 맥락 안에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런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교부들의 주석 안에 반영되었고, 이제는 모든 교리 교육의 첫 강좌에 들어 있으며, 강론과 설교 안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주하심은 신앙의 진리이지만, 쉽게 잊혀지고 외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이고 개인적인 회심은 이 진리에 대한 신뢰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우리는 성경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또 하느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 말씀은 또한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느님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청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느님께서는 성경과 전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항상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관상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이러한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고 무엇을 해오셨고, 또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기보다는 주로 많이 들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이 없었다. 만일 여러분이 오직 일주일에 단 한 번만 복음 말씀을 듣고 영적 여정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교회에 가서 여러분의 전 존재로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의 온갖 잡다한 읽을거리로 무감각해져서 성경의 생동감이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성경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해 계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으로 준비된 이들의 가슴속에 말씀하신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상황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감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슬쩍 건드리시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한다. 다시 한번 복음 말씀은 우리 안에 이미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 들어야 하며, 그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점차 비추임에로 나아갈 수 있다.

기도와 활동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내주하심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이러한 과정을 영적 감각의 발전이라고 했다. 외적인 인식들은 즉시 물질적 실체를 감지한다. 그러나 영적 인식은 하느님 말씀에 동화되고, 하느님 말씀을 내면화하고, 그 말씀을 깨닫는 점진적인 과정을 걸쳐서 다양한 형태로 신적 실체를 직접 알아차리게 된다. 이런 과정이 진전됨에 따라서, 사도 바오로(갈라 5,22-23)와 예수님께서 행복선언(마태 5,3-11)에서 열거하는 성령의 열매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런 성령의 열매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에 깨어 있다는 표시이다.
이 과정의 첫 단계는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사람처럼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계획을 비추어주시고 영광 받으실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안에 살아 계신다.
전례는 우리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 현존의 말씀과 상징을 통해 우리를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또한 전례 안에 들어 있는 성경 말씀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기도와 활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도 깨닫게 한다. 기도, 성사, 선행 모두는 한 가지 목적을 향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채 알지는 못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분을 깨닫게 한다. 성체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잠시 우리를 방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그 분의 영원한 현존을 깨닫는 것이며, 우리를 좀 더 하느님 아버지의 체험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 열매와 여덟 가지 참된 행복(진복팔단)을 통하여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지심으로써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성경의 문자적 차원literal level에서 우리는 선한 의지로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과정을 시작한다. 우리가 복음의 가치를 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증진된다. 중세기의 수도원에서는 이것을 성경의 윤리적 차원moral level이라고 했다. 우리가 훌륭한 표본이 되는 예수님의 삶에 감동을 받게 되면, 우리를 환히 밝히려고 빛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방해하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역자 주: 본능적인 욕구에 매달려서 자신이 설정해 놓은 거짓 행복 각본)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용기를 얻게 된다.
우리의 더 깊은 내면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는 성경의 우의적인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복음서 안에서 들은 것과 우리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동일한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잘못을 참아주셨다면, 우리의 잘못도 참아주실 것이다. 이 우의적 차원allegorical level에서, 우리는 성경의 보다 깊은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초대하여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차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귀에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가슴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신적 에너지에 다가감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우리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봉사와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애와 연민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우의적 차원은 예수님께서 벗을 위하여 투신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 투신은 일치의 다양한 수준으로 드러난다. 교부들은 이것을 ‘일치의 길unitive way'이라고 했다. 이 일치의 길은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가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 다른 이들이 하는 것, 심지어 엄청난 비극에 의해서도 손상되지 않는 현존이다. 우리는 우리의 원천을 찾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현존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매 순간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는 새로운 수준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모든 관계들이 변화된다. 우리 자신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런 모든 관계들을 새로운 전망 안으로 통합시키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경청하는 자세로 읽고 열린 마음으로 묵상하고 사랑으로 응답함으로써 우리는 그 말씀을 내면화하고 그 말씀과 동화된다. 더욱이 성경은 선으로 응답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러므로 기도는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자발적인 응답이다. 이 말씀은 단지 소리로만이 아니라 위격으로도 존재한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글로 쓰인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 안에서 살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 둘 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말씀은 우리의 가장 깊은 심저心底의 문을 두드린다. 왜냐하면 깨어 있지 못하는 우리의 나약한 믿음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전혀 그리고 거의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안 계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이런 환상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영적 여정은 우리의 환상을 정화시키고, 악한 것을 추구하거나 선한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이런 것은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혼란스러운 정서로 표출된다. 우리가 원하지 않은 것이 일어나거나 원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을 때 상처받은 정서가 되살아 난다. 의식의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결심으로는 원죄의 흔적을 치유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행복을 위한 무의식의 프로그램이 우리를 초기 유년기로 데려간다. 우리가 온 힘으로 영적 여정을 추구할 때까지 이것을 완전히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갈망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할 때에는 계속 혼란에 빠진다. 그러므로 만약 힘과 통제가 우리의 행복을 위한 주된 프로그램이라면(역자 주: 힘과 통제를 발휘해야 내가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환경으로 인한 혼란에 빠지지 않겠다고 온갖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계획한 것이 좌절될 때 분노, 슬픔, 절망감이 솟아 오른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나 하려고 결심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선한 결심과 반대되는 정서와 싸우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드디어 우리의 가장 깊은 심저心底에서 울려나올 때 그리스도와의 통교에서 방출되는 에너지 감각은 우리의 모든 사고와 활동 안에서 그분의 방식으로 역사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응답하려는 우리의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영적 여정을 가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1. 우리 안에 하느님의 내주하심과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힘차게 활동하심을 믿을 것,
2.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 에너지는 온화하고, 치유하고, 변형시키는 것임을 인정할 것.
3. 기도와 활동 안에서 한 걸음씩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활동하심에 마음을 열 것.
관상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기도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하느님 사랑)의 끊임없는 수련이다. 이것은 하느님 말씀을 단지 귀와 머리로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듣게 하는, 침묵하는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하느님은 침묵을 통해 가장 잘 말씀하신다. 이것은 기도하는 동안 원하지 않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듭해서 자기 승복과 믿음에 동의하는 근본적인 자세로 되돌아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에 “예”라고 동의하고, 매 순간 다시 그분의 현존의 일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신성이 현존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오소서, 주 예수님”하고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이미 여기에 와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오심은 우리의 의식 안에 점점 더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신다. 변하는 것은 우리다. 이 과정은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그 현존에 승복하고 그분의 현존 안으로 변형되어 가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배우게 되면, 우리는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에 더 민감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하는 동안 그리고 일상 안에서 성령의 은사가 적절히 드러나는 신적 에너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성체로 우리에게 오시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방식대로 우리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가를 배우도록 하신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 토마스 키팅 지음, 차덕희 옮김 P7 ~ P19 발췌함.)

* <각주> 루카 17,21. 그리서어 entos는 ‘안에’ 그리고 ‘가운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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