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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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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기도 - 그리스도인의 기본덕행
루가복음(17, 11이하)에 깨끗해진 열 명의 나환자 중, 단 한 사람만이 감사하기 위해 온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우리 역시, 고백소에서 영혼의 나병 같은 죄를 깨끗하게 용서받고, 치유받고도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저 나병환자들 같지 않을까. 성서 전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해서 전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자비와 한계성 없는 용서와 사랑에 대해 자녀로서 감사로이 받아들이는 것만이 인간의 구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어떠한 기쁨이라도 감사드리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감사 기도의 첫 단련이다. 감사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은 인자하시고,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며,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자상하게 우리를 생각하신다는 이 확신을 얻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어느 날 모든 기쁨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림으로써 기쁨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겠다는 이 결심을 굳게 지키도록 해보라. 해가 지기도 전에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틀림없이 갖게 될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생활의 어떤 면에 눈을 뜨게 되고, 더욱더 하느님께 자신을 맡겨야 할 필요성이 증가될 것이며, 더욱 깊이 의탁하는 자세로 하느님께 신뢰를 드리게 되고, 믿음이 날로 더 굳세어질 것이다.
대다수의 크리스챤들이 청하기 위해서만 손을 내밀고, 두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만 하느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주 부끄러운 사실이다. 열심한 신자라고 하는 이들도 기도할 때 항상 달라고만 하고 온갖 것들을 다 청하고, 그 청하는 것이 유익한지 해로운지 평가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청하기만 한다. 공통적으로 하는 이 구걸 행위는 흔히 아주 조리에 맞지 않는 이치를 따른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어리석은 거지처럼 행동한다. 하느님께서 온갖 선물로 그냥 동냥자루를 채워주고 옷을 주고 숙식 제공까지 해주었지만 이 걸인들은 항상 기쁘지 않고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 이유는 별 가치도 없는 그 10원짜리 동전을 꼭 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답게 행동하길 바라시는데 우리는 부끄럽게 거지처럼 행동한다. 거지의 입장에서 자녀의 입장으로 바꾸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감사의 기도이다. 감사드리는 법에 습관된 자는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하느님은 우리보다도 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계심을 알기 때문에 순간, 자신의 계획을 하느님께 강요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느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 확실하기에 감사드려야 할 것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요 사랑이며 하느님이 아버지이시란 사실을 구체적으로 생활화하는 것이다.
고통과 어려움, 슬픔과 자신의 실수에 이르기까지 감사드리는 것은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다. 여기에 도달할 때 산의 절정에 도달한 것이다. 불쾌한 것과 고통에 대해서까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진실로 사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삶이란 언제나 잘한 것과 잘못한 것,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챤은 기쁨과 고통, 더위와 추위, 평화와 폭풍 속에서도 항구히 생활할 줄 아는 사람이다. 크리스챤은 생활의 폭풍우 속에 절대로 깊이 말려들지 않고 또한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다시 헤쳐 나온다.
감사기도는 우리를 바로 거기에 이끌어야 하고, 어떠한 폭풍우 가운데서도 헤쳐 나갈 줄 알게 해야 한다. 흐린 하늘 먹구름 뒤에도 태양 빛은 언제나 빛나고 있고 걷힐 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해결책이 없는 그 문제를 하느님께서 해결하시도록 맡기고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생각지 말며 그 대신에 즉시 감사드리자. 온 마음으로 감사드리되 그 어려움이나 고통에 대해서보다 그 어려움으로부터 얻게 될 좋은 전환점에 대해 감사드리자. 하느님께서 보다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성녀 데레사는 만일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보다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문을 꽉 잠가 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녀는 강조한다. “자매들에게는 그런 일이 절대 없기를 바라노니, 하느님은 더욱 더 큰 일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십시오.”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선물을 받는 문을 열 것인가 닫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질에 달려 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하느님의 눈동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피정 도중에 예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는 너를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체험으로 큰 위안을 받았다. 더욱이 그는 예수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를 두고 비교평가할 근거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데 감사했다. 만일 우리가 예수께서는 어떠한 비교도 하지 않고 우리 각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며 각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바라신다는 것을 뼈저리게 믿기만 하면 더없는 안도감과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의 고백이 감사기도 생활인 것이다. 이러한 생활태도는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에도 나타나 있다. 옛날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오랑캐와 접해 있는 어떤 북방 국경 마을에 노인 한 분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자기가 기르던 말 한 마리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무리를 이탈하여 그만 오랑캐 나라로 도망친 것이었다. 이 사실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안타깝다는 듯이 위로했지만 그 노인은 의외로 태연했다. “천만에, 누가 아나요? 이 때문에 좋은 일이 있을지...”과연 몇 달이 지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번 달아났던 말이 이번에는 준마 한 필을 데리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서는 다들 ‘축하한다’고 야단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 도무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야 모를 일이지요. 이번 일로 모슨 재앙이 닥칠는지...”그 노인의 말은 이번에도 맞았다. 어느 날 아들이 그만 잘못하여 준마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이번에는 위로의 말을 해 왔지만 그 노인의 태도는 전과 다름없었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나서, 오랑캐가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 때문에 몸이 성한 청년들은 다들 징집되어 전장으로 나갔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사했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진 덕분에 징집을 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노인의 태도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노인에게 있어서 어떻게 슬픔도 슬픔이 아니고 기쁨도 기쁨이 아니었을까? 노인이 슬픔이나 기쁨에 무감각하다거나 무관심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 노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초연해 있다는 것은 슬픔이나 기쁨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초연하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를 따지거나 생각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동시에 실패나 하찮음 그리고 죽음 조차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비로소 신앙의 모든 힘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에 참신앙이 탄생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고맙게 받을 줄 알 때 신앙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들의 개별적인 어떠한 계획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 할 줄 알 때 사랑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앞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함께 기도하시기를 원할 때 감사기도를 바칠 수 있다.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라 하신 사도 바오로의 권고 말씀도 성령과 함께 기도 할 때에 나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감사기도 생활은 하느님의 사랑이신 은총을 항상 차고 흘러넘치게 만드는 비움의 영성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여자팔자 뒤웅박(쪼개지 아니하고 구멍만 뚫어 속을 파낸 박) 팔자다. 여자만이 아니라 인간 팔자가 뒤웅박 팔자다. 사도 바오로의 사랑의 개선가인 그리스도의 은총이 항상 내게 차고 흘러넘친다는 그 은총의 그릇이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사기도 생활인 것이다. ‘인간의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다’는 교부 떼르뚤리아누스의 말대로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인간의 응답 메아리가 우리의 감사기도생활이다.
영광과 찬미와 감사기도가 항상 영원히 메아리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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