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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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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에서 비밀로 하는 기도 (Preyer in Secret)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 6, 6).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마태 6, 5). “썩지 않는 장식 곧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으로 속마음을 치장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베드 3,4).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영)만이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생각은 하느님의 성령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1고린 2,11).
마음의 골방. 마음은 작은 그릇이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으며 생명과 천국이 있고 거룩한 도시들과 은혜로운 보물들이 있다. 우리는 자주 마음의 골방에 들어가야 한다. 모든 생각을 마음 속에 모으고, 정신을 하느님 앞에 두고 산 믿음과 뜨거운 영으로 고요히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바오로 서간 주석에서 “기도하면서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잡담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1고린 14,19). 집중하지 않은 채 많은 말을 하여 소음으로 채우는 것보다는 집중하며 짧게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이다.
주의 기도 가르침을 주셨을 때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하느님을 부르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아주 친근하고 은밀한 개인적으로 자상한 아빠로 부르도록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하느님을 부르는 방법을 완전히 뒤엎어서, 아무도 감히 부를 수 없었던 거룩하고 엄청난 신비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를 하려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아버지께, 너의 아빠에게, 너의 파파에게, 너의 늙으신네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에 이것은 이 골방 안에서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엄청난 친밀이 이미 존재함을 암시하신 것이다.
이 골방이야말로 아주 친밀하고 가까우며 아주 부드러우시고 다정하신 궁극적 신비(하느님)의 현존을 만나는 곳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무섭고 떨리며 겁나서 머리가 솟을 정도로 두려운 기도의 관계가 즉시 사라진 것이다. 이제 기도의 관계는 편안하고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비밀하게 기도하는 과정에 세 단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첫 번째는 일상적인 일과와 주변 환경,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 심리적인 인식과 관심사를 넘어서 우리 심성의 내면으로 들어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존재의 영적인 수준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그러므로 골방이란 우리의 내면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 내면이란 우리의 일상적 심리적 기능들을 넘어선 곳으로서,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아버지, 아빠가 우리를 기다리시며 또 현존하시는데 그 현존은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사야가 말했듯이, 비밀 속에 계신 하느님을 찾는 방법은 우리 또한 비밀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비밀 장소는 우리 존재의 영적인 수준을 말하며 그곳에서는 우리의 직관적 기능들 - 수동적 지력, 그리고 하느님께 향한 의지가 작용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기로 결정하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세부를 살펴보자. 우리는 문을 닫는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일과와 주변 환경을 밖에 남겨 둘 뿐만 아니라 사고와 지각, 즉 분심이라고 말하는 내적인 대화(일종의 자신과의 대화)를 밖에 남겨두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자아성찰 같은 것들도 우리가 문을 닫을 때에 밖에 남겨두는 것이다. 어떤 번역에 따르면 문을 닫는 것을 ‘빗장을 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일상적인 사고와 관심사와 내적 대화로 되돌아갈 때, 이것은 마치 당신이 일어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다. 그러면 당신은 그 과정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골방으로, 당신의 내면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다시 닫고 사고들을 떠나보내고, 친밀한 신비의 현존, 감추어진 현존, 비밀스런 현존이신 아빠에게 기도하는데 외부의 모든 것, 내부의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자아 성찰들로부터도 비밀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골방에서 기도하는 과정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것이다. 그 방에 있는 외적 소음 등에 주의를 주지 않는 내적 자유를 암시한다. 여기에는 고독과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을 형성해 가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내적 침묵이 일단 형성되면, 그 침묵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어떤 활동에로도 가지고 갈 수 있다. 우리는 점차로 소음과 활동이 있는 장소에도, 그리고 우리가 생각을 하도록 요구하는 상황에서 활동을 할 때에도, 우리는 같은 침묵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골방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곳으로 갈 수 있고 아빠를 만나는 장소인 골방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그래서 이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현존은 점차로 습관화 되어서 그 현존은 기도 중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생활에도 따라가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활동은 부드러운 아버지 아빠의 현존과 사랑과 애정과 영향이 있는 중심에서 나오게 된다. 우리는 향심기도를 정규적으로 수련하면서 이것을 알기 시작한다.
그래서 골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진행하느냐 하는 방법에 대한 예수님의 제안이며 향심기도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인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이든지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는 현대인들에게 적절한 방법이다. 우리에게 말씀으로서가 아니고 침묵이라고 하는 훌륭한 하느님의 언어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역동적인 현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의 첫 번째 언어는 침묵이며 그 외의 모든 언어는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깊은 수준에서 듣는다는 것은 가장 깊은 침묵의 수준에서 듣는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의 가슴은 하느님께 온전히 열려 있고 우리의 마음은 어떤 특정한 내용에 대하여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현존에 주의를 준다. 우리 존재의 영적인 수준에 있는 내면의 방이 우리가 향심기도 중에 일구어나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우리에게 열려있다. 그것은 (말로 한다면 우리가 말이나 아이디어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우리에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우리를 살짝 밀어주심으로써 그리고 감각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다른 기능들을 통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선함을 통하여, 심지어는 사람들의 악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든 고통과 악함의 밑바닥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며 이것은 내적인 방에서 일구진 믿음의 눈을 통하여 투시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조금씩 우리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에서 일종의 4차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례 때에 받았고, 견진 때에 강화되었고, 그리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이러한 관계를 증진하기 위하여 골방에 들어갈 때마다 강화되는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이것을 암시해 주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그냥 곁에 있기만 하면 좋은 높은 사랑의 침묵과 은밀한 관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상태가 보고 맛 들이는 관상기도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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