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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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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 복음 성서 말씀 장면은 예수께서 시로페니키아에 가셔서 가나안 여자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축귀逐鬼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 구절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읽어서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심하지 않느냐, 여자를 모욕하지 않았느냐는 태도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당 시대에 실지로 이방인들을 개만도 못한 동물 취급을 한 시대이며, 여자도 인간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오 복음 전체의 흐름을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개자식이라고 취급받았던 이방인들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하느님의 식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작은 신앙, 신앙의 약한 점을 예수께서 택하신 그 대상이 되겠는데 여기에서 이방인의 가나안 여자는 당신의 생각은 믿음은 크기도 하다는 대상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장 핵심 생명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자기 주인의 자비로 강아지도 먹고 살 듯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제 딸이 마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 가나안 여인은 비록 강아지 신세 처지로 취급받아도 무슨 큰일로 상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이라는 것은 화자의 목소리나 표정에 따라 얼마든지 그 내용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소를 지으며 할 수 있는 말이 있는가 하면, 적개심을 가지지 않고서는, 또한 솔직한 얼굴로는 도저히 꺼낼 수 없는 그런 말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인종 간의 다툼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는 분노나 유감스러운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고는 심각하게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만,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경우에는 농담 삼아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인종적, 민족적 차이에 대해서 이러한 종류의 농담을 하고 있었다는 것 외에는 그의 국수주의, 그리고 무례한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별 생각 없이 엄숙함을 가장한 채 그런 별명으로 여인을 불렀지만, 재치 있는 여인은 얼른 그리스도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에 관하여 단계적 ABC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으로 나오고, 두 번째는 그 기적을 요구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 거절, 진실한 표징과 기적은 예수님 자신의 삶이고 그분의 사는 삶의 방향이고 세 번째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사고방식, 그러한 것을 분류하는 말씀입니다. 이 빵을 통해서 나타난 교회의 모습도 그 빵을 같이 나누고 서로 주고받는 교회 모습으로써 드러나고 그러한 모습으로 십자가에까지 이른다는 그러한 것이 그 다음 성서말씀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차원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빵’에 대한 교리교육의 틀에서 바리사이 사람들과의 논쟁은 정결례의 장애들을 제거했고, 성찬 식탁에 이르기 위한 조건으로 윤리적인 정결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가나안 여인의 일화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이제 이방인들도 교회의 식탁에 앉아 ‘자녀들의 빵’을 함께 받을 수 있도록 ‘이방인’들에게 하신 유일한 요구처럼 보입니다.
2) 80년대의 교회를 위해서, 특히 개종자들에게 적게 마음을 연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마태오는 이 이야기를 선교적 가르침으로 만듭니다. 확실히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메시아의 사명을 매우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한 이방인의 본보기적인 신앙에 응해 주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 만일 어떤 율사들이 이미 배타성들을 극복했다면, 또 ‘가나안 사람’들이 메시아를 향해, 하느님 백성을 향해 그토록 큰 신앙을 표현한다고 해도 교회는 여전히 그들에게 문을 닫을 것인가? 그러면서 교회는 그것을 그리스도 전파의 한계성 때문이라고 떠넘기며 우기겠는가?
3) 이 단원의 범위(마태 12,22-16,20)에서 가나안 여인은 제자들에게는 신앙의 한 본보기이며, 그들이 따르는 분의 명성이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케 하는 사례입니다. 두 번째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는 ‘자녀들의 빵’이 언젠가 지상의 모든 사람들의 양식이 되리라고 알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서 말씀에 이 가나안 여인은 그 당 시대 사람들이 개(동물) 취급하던 이방인에 대한 견해 말씀을 유머러스 있게 하셔도 불쾌해 하기는커녕 순종적인 신앙을 고백합니다. 거룩한 역사의 위계에서 이스라엘 자녀들은 우선권을 갖고 ‘주인들’이 됩니다. 따라서 이 이방인 여인은 하느님 간택의 신비의 ‘부스러기들’만을 요청합니다(27절). 그렇게 그녀는, 예수를 보내신 참된 하느님과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이스라엘의 특권을 선언하면서 진정한 ‘개종자’의 신앙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녀의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녀는 두 번을 되풀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표명합니다.(15,22-25참조).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녀의 믿음대로 그 간청을 들어주십니다. 결론(28절)은 백부장 일화의 결론을 본받습니다(8,13 참조).
자비가 원수를 물리치고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사람을 이웃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주인의 자비로 강아지들도 먹고 살 듯이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거지신세 비록 강아지들 같은 신세로 여겨지더라는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부스러기가 아니라면 죄 많은 인간들이 저 개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고 구원될 수 있느냐는 가나안의 여인의 순종적 믿음을 고백을 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대로 그 간청을 들어주시고 그의 딸을 악령에서 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 그리하면 (사람들이 여러분의 품에) 후한 되(를 안겨 줄 것입니다).” 먼저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의 원형을 제시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권하십니다.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 “마지막으로 그분은 영예를 약속하십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품에) 후한 되(를 안겨) 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무한이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비를 스스로 제한하거나 한계성의 조건을 붙여 축소하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되로 주고 말로 받게 되는 후한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비의 핵심은, 상대가 누구이든 동전 몇 개나 지폐 한두여 장 쥐여 주는 식의 자선은 결코 사람들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멸과 차별, 편견과 분열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방식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차별하면 나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차별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 위’ 사람이 되어 밥알 부스러기 정도 떨어뜨려주는 걸로 만족감을 얻고자 한다면, 또 그 누군가는 나를 상 밑에 내려놓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잘난 인간도 하느님에겐 한없이 부족한 자식일 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선 그 누구도 차별 없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피조물의 모든 활동은 자비의 활동을 전제하고, 자신 안에는 물론이고 자비의 활동 안에도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자비의 힘은 만물을 보호하고, 만물 안에서 가장 힘차게 움직입니다. 이런 이유로 시편 저자는 주님의 자비가 “온 땅에 충만하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 성서 말씀 장면을 묵상하면서 편 가르기 무한 경쟁 호랑이 등에 올라 탄 이 정권의 교육정책이 우리 사회 구조 식탁 상위에 20 아니 10도 안 되는 사람들만의 빵만 주고 80 아니 90이 식탁 아래 있는 개 같은 사람들에게는 빵부스러기도 주지 않겠다는 실종되는 교육복지나 경쟁시켜야 경쟁이 된다는 망국교육 정책의 기가 막힐 뿐입니다. 아무리 단순한 군대 사회에서 그저 무엇이든지 선착순으로 달리기만 잘하면 된다는 그 군대에서는 공정하고 합리적이라고 착각 할 수도 있는 악몽이라지만 우리 인간 인생이 어찌 달리기 운동 한 가지 면으로만 모든 것이 해결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경쟁시켜야 경쟁력이 생긴다는 이 정권의 경제 정책은 도시 무얼 경쟁시키느냐? 가 더욱 문제로 군대의 선착순처럼 달리기만이라면 모두가 올림픽 달리기 선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정권의 교육정책은 ‘수월성’을 짝지운 점입니다. 적절한 경쟁이 학업성취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교육학의 상식입니다. 하지만 경쟁이 수월성을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결코 아닙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나라가 바로 핀란드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등수도 매기지 않고, 일제히 고사도 치르지 않으며, 선발경쟁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경제협력개발기구의 국제학력평가(PISA)에서 우리나라와 수위를 다툽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학생들에게 가혹한 경쟁과 무거운 학습노동을 지우는 ‘공부지옥’인 데 반해, 핀란드는 학생의 70%가 ‘공부가 즐겁다’고 답하는 ‘공부천국’(?)이라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 교육경쟁력 세계 1위로 공인받는 핀란드 교육의 특징을 꼽아보면 교사들의 수준이 높고, 학습동기 부여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며, 학생 개개인에 대한 밀착 돌봄이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교육예산이 풍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개인간 경쟁을 거의 완벽히 배제한다는 특징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석차를 매기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수업방식도 우리와 상당히 다릅니다. 수업시간에 4~5명으로 이뤄진 팀별로 탐구와 토론, 각종작업이 이뤄지고, 교사는 각 팀의 진행을 계속 점검하며 상호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학습 방식을 협동 학습이라고 합니다. 핑크 플로이드의 저항적 노래를 앨런 파커 감독이 <벽>(The Wall)이란 영화로 탄생시켰습니다. 거기서 학교란 학생들을 몰개성의 소시지로 만들어 일렬로 뱉어내는 공장으로 묘사됩니다. 핀란드는 경쟁이 아니라 창의성을 존중하는 자유롭고 개성 강한 학교 체계를 갖고도 국제적으로 평가되는 경쟁력에서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육복지 정책이 변질되는 것을 보면서, 현 정부가 아무리 아니라 하여도 결과적으로 우리 학교가 불행히도 ‘핑크 플로이드의 학교’로 갈 것 같은 불길함을 떨칠 수 없습니다.
초등학생들까지도 학원으로 내몰고 밤 12시까지 4, 5시간 밖에 잠을 재우지 않고 공부로 경쟁의 희생물로 만들어 그 많은 교육비를 투자해도 세계에 65위권 아래 교육의 질밖에 외우는 컴퓨터 저장기 칩 같은 인간들로 세계화 교육이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오늘 복음 성서 말씀 장면에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하신 지적말씀에도 가나안 여인이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육 못 받은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고 간청하였듯이 내 자녀들에게도 교육의 균등한 기회는 부스러기도 먹을 수 있도록 우리나라 망국교육 정책 악령을 물리치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로또 복권이나 슬로머신, 경마 도박의 주술에 걸려 내 자녀들도 노력하면 더 좋은 성적을 얻어 신분 계층 상승으로 식탁 위에 자녀가 되겠지 하는 착각 환상에 빠진다면 식탁 아래에서 개 같은 강아지에게 빵부스러기도 던져 주지 않는 식의 분리교육 정책을 지난번 시 교육감 선거 같이 선택한다면 과연 어느 누구 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 자신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들의 자비를 베풀지도 받지 않겠다는 진리의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전능하신 하느님도 용서하실 수 없다고 성서 말씀에서 지적하십니다.
오늘 복음 성서 장면에 가나안 여인 같은 순종적 큰 믿음으로 악령 들리게 하는 자녀들의 교육에서 치유의 교육 기적을 이루어 내십시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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