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안에서 사랑하는 벗이여, 나는 날마다 성찬식을 집전할 때면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다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의 신비로 우리의 비천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천상적 실체들에 동참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신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 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
자체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몸담고 그분 몸의 지체들이 된 까닭에 성삼위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자비로우신 능력으로 아버지께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하는 벗이여, 이것은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거나 노력해서 얻어 누리는
무엇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까닭을 알겠습니까? 우리
존재는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우리 존재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상으로 받은 것을 거저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실제로 죄는 단 하나 - 사랑하지 않는 것- 뿐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은 신앙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하나
되는 일은 일상적 체험의 문제입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1요한 4,12)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랑받을 무슨 자격
때문이 아니라 -- 물론 그들이 사랑받을 만하다는 것은 우리도 압니다. -- 우리가 그들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벗이든 적이든, 친지든
낯선 이든, 은인이든 경쟁 상대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반응ㅇ르 보일 수도 보여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 사랑을 찾되
사랑의 탐색 관상기도를 통해 찾으십시오. 생명수가 담긴 저수지에 몸을 담그듯이 이 기도 속에 깊숙이 몸을 담그십시오. 암사슴이 시냇물을 간절히
바라듯이 이 기도를 간절히 바라십시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이 기도를 기다리고 고대하십시오. 넘치는 강물처럼 그대의 마음속에 성령을 쏟아
부으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에서 이 기도를 받으십시오.
- 사랑의 탐색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