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서는 제 돈주고 잘 사지 않는 것이 몇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포도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포도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어릴 때 저희집에
포도 과수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는 여름만 되면 잘 익은 포도를 먹고 싶은만큼, 그것도 공짜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과수원을 팔고 이사를 감으로써 포도를 사먹어야 했는데 돈이 아까워서(옛날 생각에) 도저히 사먹을 수가 없더군요.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필요한
경우 사기는 합니다만 돈 아까답다는 생각은 아직도 완전히 지워지질 않았습니다.
그 시절, 아버지를 도와드렸던 경험이 있어 포도농사가
낯설지 않을 뿐더러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 말씀이 다른 비유 말씀보다 더 친근하게 들립니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탐스럽게 익은 포도는
정말 맛있습니다. 특히 저희집 포도는 달고 맛있기로 소문이 나서 직접 시장에 내다 팔거나 경매를 통해 팔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를 가만히 살펴보면 포도열매는 분명 가지에 달렸는데 그 열매가 달리고 익기까지 가지가 한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일꾼들이 뿌려주는 거름의 영양분은 뿌리가 빨아 올렸고 내리 쬐는 햇살은 잎사귀들이 다 받아 주었습니다.
가지들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맺히는 곳은 뿌리나 잎사귀가 아니고 가지들이었습니다.
향심기도를 시작한지 5~6년이 되다보니 저에게도 하나 둘 열매(선물)가 맺히기 시작하는가 봅니다. 예전에는 꿈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신부님, 모습(인상)이 참 편안합니다"라는 말도 가끔씩 듣게 되고, 예전에는 두고두고 속앓이를 할 일을 당하거나 말을 들어도 그냥 실실 웃어
넘기기 일쑤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수련이 한참 덜된 탓에 가끔씩이긴 하지만 더 많은 열매가 맺혔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지가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직도 제가 가지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탓이겠지요. 아버지는 가지에
많은 열매가 달렸다고 그것들을 다 부쳐두지는 않았습니다. 가지의 상태에 따라 알맞게만 남겨두고 속아 내셨습니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열매만 맺히게 하실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주님, 저는 가지임을, 포도나무이신 당신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되는 가지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