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상지원단

2023.11.21 08:07

歸天(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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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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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입동 추위를 맞는 한 주간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철학자 막스 쉘러가 독일 프랑크프르트 대학에서 "내일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강의를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음날 그의 명강의를 듣고자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메워졌고 흥분된 분위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스 쉘러 교수는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았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교직원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교수님이 방금 운명하였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노교수는 그날 아침 식탁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운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날 강의실은 교수의 명복을 비는 침묵 속에 잠겼으며 이는 바로 인간의 죽음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었던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내세의 생명은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였듯이 '영혼의 불사불멸' 때문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일으키신 '부활' 때문에 갖게 되는 선사받은 새로운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가까이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삶은 천사들의 것과 같아서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논쟁할 때 늘 권위로 인용하던 모세의 율법서를 예로 듭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출애굽기 3장 6절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소개하셨다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 말씀 자체는 출애굽기 자체 안에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는 상관이 없는 말씀이었지만,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 말씀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십니다.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죽은 지 이미 오랜 후에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그들 성조들의 하느님이라고 계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조들이 부활하여 하느님 가까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부연설명을 하시는데, 사실 성조들에게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살아있는 것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은 구약성서의 근본 믿음 중의 하나입니다.
한편 신약시대에 이르러 미사 때에 주례 사제의 '신앙의 신비여!'라는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는 응답은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내용과 합치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이 인생에 관련된 궁극적 질문들과 깊이 관련이 있습니다. 인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각종 인간 관계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사랑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성서는 다음과 같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표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는 매 주일 미사 때마다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앙과 희망의 근본적 근거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우리들의 부활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내세의 삶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런 사상의 경향이 온 데에는 한편으로는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에 대한 기다림은 현세를 변화시킬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라고 보는 종교 비판자들의 영향도 적지 않지만, 물질주의-경제중심주의적 교육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집단적 욕망이 들끓는 듯한 세상 속에서 '내세의 삶'에 대해 말하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뒤따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조차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는 사도 바오로께서 다음과 같이 너무나 명확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고': 필자 삽입)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19).
성서가 증언하고 교회사에서 빛나는 신앙의 증거자들이 증언해 왔듯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 신앙의 기초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역경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고, 불굴의 희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우리의 전체가 아님을 인식하게 하여, 때로는 현실에 대하여 '초연'하게도 만듭니다. 여기서 '초연한다'는 말은 세상살이에 무관심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는 하되 그것이 전부인 양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적 삶과 가르침에 바탕을 둔 종말론이라면 결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초연할 줄 아는 신앙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며 탐욕에 빠지지 않게도 만듭니다.
우리는 종종 죽음과 삶이 서로 정반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이 말은 사실입니다. 분명히 죽음은 결정적 단절이요 파괴임에 틀림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재물을 빼앗아 가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유대마저도 끊어 놓습니다. 하지만 죽음과 삶을 좀더 깊은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우리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죽음으로 인생이 허무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고 꽃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려주셨고, 그 시작에 우리 인간이 전 존재로 참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시작, 가슴 뛰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형영 시인은 전야(前夜)란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여행 떠나는 전날 밤 설레듯이 저승 가는 그 날에도 설렐 수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어린 시절 소풍가기 전날 밤, 가슴 설레었던 추억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저승 가기 전날에도 그렇게 가슴 설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 뒤에 어떤 일이 있을지 훤히 알고 있다면 아마 기대감에 부푼 설레이는 인간 죽음의 전야를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천사같아서 죽는 일도, 시집장가 가는 일도 없는, 보다 다른 차원의 사랑의 인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세계의 마지막 종말론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의 사전 사건화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이 끝장난 곳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행위인 것입니다. 이 세상과 인간을 무에서 창조하신 하느님이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세력인 인간의 죽음을 이기시고 새로운 생명을 가능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살아있는 하느님과 인간의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라는 고백으로 신앙고백의 끝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한 인간의 육신은 변화되고 완성된 육신으로서 우리 인간의 사상을 뛰어넘어, 아름답고 좋은 모습을 지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초에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느님이 세상의 마지막도 좋고, 보다 아름답게 완성시키실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함께 묵상하십시다.
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주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부활 신앙을 증거하라고 초대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보호하고 발전시키고 우리 주변에 희망을 전파시키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선하심과 충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라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시작하지만 후에 충만하게 되어 영원히 계속되는 '하느님과의 일치'의 삶으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영원한 희망에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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