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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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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시로다, 어두움이 빛을 이겨 본적이 없다하신 빛 자체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행복하고 거룩한 밤에 결코 지지 않는 태양이 떠올랐다. 예수 성탄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하느님과 함께 하는 희망의 탄생일인 것이다. 라이 렝 운이라는 싱가폴의 17세 소녀가 지은 '나는 믿어요'란 시를 읽으며, 우리의 희망으로 오늘 탄생하신 아기 주님과 함께 새해를 열어봅시다.
나는 믿어요 아직 살 만한 희망이 있음을 단지 존재만 할 것이 아니라 인생의 이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딘가에 도움을 뻗쳐 줄 손이 있음을 이 지치고 지친 세월에도 찾기만 한다면 손을 써 온 분이 있음을
나는 알아요 이 절망의 골짜기에도 어딘가에 편히 쉴 곳이 있음을 이 혼란의 와중에도 어딘가에 따라갈 만한 바른 길이 있음을 가짜투성이의 이 세상에도 기다리는 착실한 벗이 있음을 이 더럽혀진 세월에도 정화될 만한 희망이 있음을 나는 믿어요

우리가 할 일은, 아무리 사소하고 무의미하더라도 희망의 표지들을 찾아보는 일이며 그렇게 하여 인생을 이어가는 것 뿐이다. 우리는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서 바로 오늘 힘을 찾아야 한다. 시몬 베이유의 글대로 '영혼은 공허 중에서 사랑하기를 계속해 나가야 하고, 그것이 아무리 미소한 부분에 그칠지라도 적어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계속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라이 렝 운의 시귀를 빌려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가짜투성이의 세상에서 사랑의 미소한 표지만 있어도 거기서 시작해야만 한다. 라이 렝 운이나 시몬 베이유가 세상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감지한 하느님의 손을 내세워 주시는 분이 아니다. 두 여성의 하느님은 특종 기사를 만들어 내시는 하느님이 아니다. 라이 렝 운, 시몬 베이유 두 여성의 하느님은 사랑의 극소한 표지에서부터 시작하시는 분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기란, 구유에 누워 계신 한 갓난 아기와 함께 살며, 지속적인 회개 생활로 주 안에 거듭나기를 항상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싹 있는 인간으로 말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자궁을 통해서, 생명이 수태되고 출생하는 인간의 심부를 통해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길을 택하셨다. 하느님이 세상에 거하시는 당신의 현존, 인류를 위하시는 당신 구원을 나타내시려고 인간의 자궁을 택하신 까닭에, 이것은 생명의 씨앗을 희망의 씨앗으로 단언하신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태내에 생명의 씨앗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구원의 희망을 체현體現한 생명의 씨앗. 루가는 구세주의 탄생을 이렇게 제시함으로써 심원한 종교적 직관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 자궁이 인간 희망의 체현體現이 된다. 그곳으로 하느님이 우리와 만나러 오시고 우리와 일치를 이루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신다. 마리아의 태중에 신인神人이 잉태되고 태어난다. 마리아의 자궁은 새 세계, 새 창조계가 된다. 하느님이 인간 자궁에 들어오셔서 하느님이자 사람인 새 생명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느님과 인류에게 다 책임이 있는 생명, 사랑과 구속의 새 계약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맺는 생명을 그곳에서 창조하신 것이다.
인류의 희망가인 마리아의 노래(마니피깟)를 읊기에 앞서, 하느님의 구세적 사랑을 감지하고 체득하는 일에 있어서 여성의 위치에 관해 몇 마디하고 싶다. 하느님의 구원 사명에 있어서 여성은 특수한 역할을 맡고 있다. 여성이 태중에 생명의 씨앗을 받아들이고 키우고 낳는 능력에서 비롯하는 역할이다. 여성의 몸 안에 깃든 새 생명의 고동은 새 창조의 고동이다. 여성의 몸에서 기적적인 창조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성은 하느님의 창조에 직접 참여하도록 만들어졌다. 여성은 말 그대로 하느님과 공동 창조자이다.
하느님 안에 있는 희망의 힘을 욥기에서 묵상할 수 있다. 욥은 자기가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태어났던가? 한탄 했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욥기 3, 20). 자기 왜 고초를 받아야만 하는가고 묻고 친구들이 제기하는 해답을 들으면서 그는 고뇌의 함정에 떨어졌다고 느끼는 반항적인 인간으로 바뀐다. 끝에 가서 욥은 왜냐는 질문을 그쳐야 했다. 그리고 질문을 그치자 그는 하느님의 사랑 깊은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을 발견케 된다.
한스 큉 신부에 의하면 희망이 전혀 없는 거기서부터 하느님과 함께 하는 희망 부활의 빛 속에서 십자가는 무자비하신 하느님이 인간의 죄과로 요구하는 희생의 제물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은 '자신의 외아들이 […] 극도의 고통 속에서 버림받아 죽어갈 때 가까이에서 연대 속에 있던 분, 이와 함께 우리의 아픔과 결합하고 (우리의 책임이 있든 없든)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며 우리의 비참함과 온갖 불의를 같이 당하는 분으로서 보이지 않게 함께-고통받는 분으로, 그러나 바로 이런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무한히 선하고(gütig) 전능한(mächtig)신'으로 나타난다.
큉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함께-고통받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근거로 인간은 고통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 물론 큉은 십자가의 이름으로 모든 고통을 무조건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가 고통을 미화하는 데에 남용되는 것을 비난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극복 가능한 고통은 극복할 수 있도록 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예수 또한 고통을 무조건 참아 받은 것이 아니라 병자의 치유나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에서 나타나듯이 고통을 거슬러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고통을 궁극적으로 다 이겨낼 수는 없는데,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하는 고통에 대해서 십자가의 신앙은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을 선사한다는 것이 큉의 확신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비록 '고통을 비켜가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고통을 거쳐가는 길'을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앙인은 고통이나 역경 앞에 결코 좌절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감싸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바탕으로 큉은 예수의 십자가가 의미없는 고통을 비록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지는 못해도 이를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길을 열어준다고 주장하며, 바울로 사도가 이에 대한 산 증인이라고 내세운다(참조: 2고린 4,8f ; 6,9f).
예수는 자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잃은 자들의 하느님을 선포하였는데, 이 하느님은 실패의 상징으로 보이는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함께-고통받는 하느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를 믿는 신앙인은 어떤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이 보이지 않게 함께 하시고 그분께 자신이 지탱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고통과 역경 앞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십자가는 인간이 고통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 길, 고통에서 자유와 구원을 선사한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을 가질 만한 일들이 눈에 띄지 않는 세상이다. 위정자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본분을 잊은 지 오래고, 그들의 작태를 보노라면 분통만 터진다. 장기적인 경제 불황으로 서민들은 삶에 찌들어 있고, 이웃 간에도 자신을 내어놓는 일에 인색하기만 합니다. 삶의 주변이 이렇다보니 너나없이 마음의 여유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럴 때 희망의 등불이 되어줄 지도자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말이다.
사는 일이 신명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세상이 이렇다고 주저앉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어쩌다 한 번씩 터지는 대박이 아니라, 작고 하찮다고 여기는 것들일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희망은 저 산너머가 아니라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너와 내가 어우러지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희망을 일궈가야 한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에게는 마음에 담긴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희망일 수 있다. 자신을 나누어 줄 각오로 내가 먼저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민다면 그것은 분명 희망의 빛줄기가 될 것이다. 희망을 만드는 것은 나와 나의 이웃이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며 희망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치유와 건강의 수단으로써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축제들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지낸다면, 우리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말했듯이 삶이 하느님을 지속적으로 찬미하기 위한 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런 축제를 통해 분주함과 불안의 악순환을 깨고 삶의 복잡한 시간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평안에도 동참하게 된다.

우리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희망’입니다. 이 ‘희망’이란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가까운 곳에 있는 좋은 것들에 대한 ‘바램’입니다. 좋은 만남, 맛있는 식사, 반가운 모습, 화해와 용서와 이해와 관심의 모습, 웃음과 친밀함과 다정함... 이런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삶의 힘을 얻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자는 힘을 잃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I마카 2,61). 말씀으로 우리는 새해 2006년 이 한 해 동안 희망과 힘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2006년 병술년 새해 화두는 ‘너 자신을 희망의 빛으로 삼아라! 사람이 희망의 빛이다.’로 향심기도 가족 여러분에게 감히 새해 인사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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