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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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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 끌르델이라는 희곡 작가는 십자가의 실패한 모습을 비단신이란 작품에서 이렇게 나타내줍니다.
한 예수회 선교사가 탔던 배가 망망대해에서 하루 아침에 해적 일당에 의해 격침되었습니다.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저마다 살겠다며 배 위에 있는, 무엇이든지 손에 거머쥐었습니다. 선교사도 역시 배의 한 들보에 눕혀져 바다 위로 떠다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 세상살이를 고통의 바다로 비유하여 인생을 보면, 저마다 살겠다고 거머쥔 물질, 쾌락, 권세를 손에 쥐고 자기 세상을 만난 듯, 승리에 도취되고 만끽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한편, 십자가 나무 위에 자기 인생을 오로지 의지한 예수회 선교사는 점점 바다 속 깊이 가라앉는 것과 같은 실의와 시련에 밀물만 휘몰아칩니다. 바다 속 수압에 짓눌려가는 실패를, 심연의 어둠이 더욱 깊어져만 가는 실패만을 부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살겠다고 붙잡은 물질, , 권력 등으로 운명을 끝낼 수밖에 없었고, 실패로만 보이는 십자가를 잡은 자는 이렇게 마지막 독백을 남겼습니다.
주여, 나를 이렇게 묶어 주셨으니 감사드리나이다. 때로는 주의 분부가 짐으로만 여겨지고 주의 계명 앞에 내 뜻을 펼 바를 몰라 암담했습니다. 이 몸의 어느 지체를 살펴보아도 주께로부터 조금이라도 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나이다. 이제 정말로 십자가에 달려 있으나, 내가 매달려 있는 이 십자가만은 아무 것에도 달려 있지 않나이다. 다만 바위 위로 떠다닐 뿐이며, 아직은 바다가 현 시각의 권세이며 위험임을 알고 있나이다. 이 세상은 실패작이라고 할 십자가만이 하느님과 나를 하나로 묶어주고, 비록 부활의 승리가 있긴 하지만, 아직 저는 우리 손에 잡히는 것부터 차지하겠다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합니다." 신앙과 사랑의 신비! 그 사람 바보야! 하느님과 인간들을 철저하게 위하신 주님은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십자가상의 바보인 것입니다.


확실히 주님은 십자가의 정도에 따라, 이 세상을 살지 않고 불의부정에 적당히 쉽게 살아가려는 자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며, 실패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즐기는 찰나주의를 살고 있을 뿐이며, 진리니, 양심이니, 인간성이니 하며 지지궁상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사는 것보다, 돈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버리겠다는 파우스트의 주인공처럼 흐느끼며 살아갑니다.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 이 세상 권세까지도 동정하기에 이르는 주님은 인격적인 면에서 철저히 실패한 자가 아닙니까?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상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라. 남은 살리면서 자기 자신은 살리지 못하는구나.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어보겠다.”하며 비웃는 군중에게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당하기만 하고 어쩌면 그다지도 지기만 하시니, 과연 무슨 해결이랄 수가 있는가? 아니 진짜로 할 말이 없으신 것 같은 주님, 침묵의 섭리는 사랑의 심연이란 말인가? 겟세마니 동산에서 내 마음이 죽도록 괴롭소.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될 수 있는 일이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시며 인간적인 실패를 자인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가? 또 한편으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운명하시기 직전에 하느님, 내 하느님 왜 스스로 그만두십니까?”하시며, 하느님에게까지 버림받은 배신 감정에 자신의 온 몸을 부르르 떨어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의 행실이 악하기 때문에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고독했고, 군중 속에서 고독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의 실패는 인간의 악의와 인간의 자포자기 대신, 실제의 상징인 것입니다. 성부께 청하면 금방 12군대나 더 되는 천사를 보낼 수 있지만, 그렇게 악에는 더 큰 악으로 대하시지 않는 데 십자가 실패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실패란, 부활한 신앙과 사랑에까지 연결되지 않은 엠마오 가는 길 도중에 만난 두 제자의 실의와도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승리를 엿볼 단계에 이릅니다. 이렇다할 까닭도 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우선 자기가 하느님에게까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인간이 소리쳐 도움을 청할 때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과 더불어 소리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느님은 그 인간과 적대시하며 마주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 인간 마음과 정신과 몸으로 함께 겪고 계시는 분이며, 우리는 같은 편에 서 계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인간은 자기 곤경 속에서 끝내 입을 다물고 다 마쳤다.” 하시는 인간미 흐르는 주님과 함께 자기 고통을 항의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이 살아 있기에, 아직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받는 것이고, 사랑하기에 살아 있는 것이지, 삶과 인간을 포기한다면 인생에서 무엇이 남겠습니까? 어느 누구든지 사랑하기를 그친다면 더 이상 고통도 받지않을 것입니다. 그런 자는 삶에 대해 무관심해질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이 커질수록 또한 거기서 받는 고통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사랑이 인간을 살아있게도 만들고, 인간을 죽게도 만든다는 것은 사랑이 삶과 죽음을 벗어나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승리는 삶과 사랑의 승리요, 죽음을 이긴 승리인 것입니다. 애인끼리 속삭일 때도 영원한 내 사랑 당신이란 말은 바로 이 십자가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 위에 두는 사람, 즉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사랑에 종속시킬 용의가 있는 사람에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그는 십자가의 승리를 얻게 됩니다.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는 버림받은 인생의 패배자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이와 정반대로, 그분은 우주적 진화 과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분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비애와 억압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고스럽고 고된 창조적 통일 활동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십자가의 어두운 그늘 속에만 파묻혀 살지 말고, 불같이 뜨거운 십자가 사랑의 열정 속에 잠겨 살라는 것이라고 떼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님은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삶은, 성세성사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상에서 자기 생활의 실상과 십자가의 실존적 구조로 이 세상의 삶을 사는 것이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이 결코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달아가는 피나는 사랑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참다운 의미와 실제와 상징으로 과거의 보상과 속죄의 면이 강조되다 보니, 많은 고통으로 우리에게 매력 없고 짐스럽게만 보이기에, 우리는 십자가 없는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전진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정화함으로써만 빛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을 고무함으로서 빛나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손짓하는, 저 안개 자욱한 정상을 바라보며 우주 진화의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왕도는 초자연적으로, 굳게 뻗어진 인간 노력의 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다면, 결코 인생을 슬프고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오직 이해할 만한 삶의 존엄성에 마음을 쏟으며, 더욱 사랑과 기쁨과 즐거움을 안을 때, 달고 가벼운 인생의 짐을 지게 됩니다. 십자가란, 우리 인간이 다른 인간과 만남으로써 하느님과 만나게 되는 사랑의 약속 표시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인간과 만나면 악수하면서 서로 의지하여 살겠다는 뜻의 십자 표시로서, 자기 자신이 그 인간에게 매달렸다고 표시합니다. 어느 대학생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입만 벙긋하시면 하느님의 사랑이니 인간의 사랑이니 하시는데, 딱 한마디 말씀으로, 도대체 인간의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이란 두 글자는 길고도 짧은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고, ‘둥근지 세모가 났는지, 네모가 났는지, 끝 간 데를 모를레라.’며 옛 시를 읊을 수도, 또는 돌림노래로, 제각기 말할 수 있는 사랑을 어떻게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때에 저는 번뜩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 벽에 걸린 십자가가 무슨 표시냐?”고 물었고, 그 학생은 더하기표입니다라고 장난기어린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표시인 십자가는 자기 자신에다 끊임없이 다른 인간들을 사랑으로 더해 가는 표시로서, 이 말은 결혼 전에 서로 홀로였던 두 인간이 한 몸이 되어 일평생 서로 더해가는 것이 부부애라는 것입니다. 또한 끊임없이 자녀들을 사랑으로 더해가는 부성애니 모성애니 하며 일컫는 부모 사랑이며, 한정되게 테두리져 있는 인간들끼리 벗으로 더해가는 우정이며, 이웃끼리 서로 더해가는 이웃사랑이 아니냐고 저는 오히려 반문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한 인물로 창조되지 않고, 애초부터 무엇인가 부족하고 결핍된 존재로, 다른 인간과 사랑으로 더해져야만 하느님과 같이 완전한 자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 인생살이의 수단과 방법을 십자가 정도인, 이런 십자가 더하기 계산으로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따라 사는 우리도 끊임없이 다른 인간들과 더하기하는 사랑의 십자가 인생길로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챤 생활이 아닙니까?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만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십자가로 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그 곳에서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더하기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단 한 가지 사랑의 길, 다른 인간을 더함으로써 하느님을 더하는 사랑하는 것과, 희생의 십자가 형태인 '더하기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는 생활력입니다. 사랑과 희생, 그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가려잡으려고 할 때, 즉 다른 인간을 더하려고 하지 않을 때, ‘라는 인간에서 빼기표로 나타나는 타인은 바로 내게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무수한 대인관계에서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더하기 인생살이가 아니라, 빼기 인생살이, 아니 아예 자신은 십자가 사랑에 매달리지 않고, 너나 남만을 매달아 놓기 일쑤입니다. 기실(其實),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금관의 예수님은 내려오셔서 가난하고 병들고 인권이 짓밟혀온 비인간화된 자들과 함께,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살인 공범처럼 무관심과 자포자기 속에서 우리가 언제 주님을 핍박하였습니까?”라고 말하는 우리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 그리스도다.”가시 돋은 채찍이나 발길질을 하다간, 너만 다칠 뿐이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언제나 머리와 가슴과 양어깨 사이로 십자가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더하기 사랑을 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다 이웃과 당신을 더하렵니다.”라는 사랑의 약속 표시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 표시로서 두 손을 합장하고 악수하지만, 언제나 빼기만 하는 대인관계에서 적자 인생의 좌도와 같이, 돌이킬 수 없이 잘못 살고 있는 한 인간, 악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저 십자가는 그 위에 매달려 당신 두 팔을 벌리시는 기도의 자세요, 다른 모든 인간들을 포옹으로 받아들이시며, 철저하게 타인을 위한 헌신적인 기구와 받아들이는 양면의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같이 신앙과 사랑으로 영원히 살아갈 가치있는 생명이 될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현대인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때, 자신이 무엇을 가졌나, 즉 소유욕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존재와 소유는 바뀌고, 기술 사회를 만드는 맹목적인 존재로서, 소유화시켜, 인간성이 날로 비인간성으로 전락해버립니다. 이제 우리는 인생살이에서 빼기만 하는 것과 같이 피해망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느님을 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바로 사랑이란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 이니라! 너희가 나를 먼저 사랑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노라. 내 생명을 바치기까지, 지금까지도 이긴 사랑의 승리로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내가 먼저 하는 사랑과 더하기 사랑으로 해결하지 못한 사랑이 어디 있겠으며, 열리지 않을 인간의 마음이 어디 있겠느냐?” 사랑의 열쇠? 그것은 이런 더하기 사랑인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먼저 매달고, 남을 위한 인간성으로, 인생의 수수께끼를 사랑의 제물로서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저 십자가상에서 재촉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밖에 원하는 것은 십자가! 이는 다른 인간에다 자기 자신 전체를 매달고 사는 사랑의 절정인 행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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