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마치 인생의 황혼기와도 같다. 벼가 무르익어 황금빛 들녘이었다가, 수확을 마친 들녘은 휑한 느낌을 준다. 11월은 교회 달력의 마지막
시기를, 교회는 ‘위령 성월’을 지내며 죽음을 묵상한다.
통계를 보면, 하루에 15만 명이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언젠가 나도 그 중에
한 명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죽음에서 제외된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 모두가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죽음은 모두에게 예외 없이 찾아오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고 했다. 이처럼, 죽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며,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다. 죽음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는 일보다 사는 일에 더 매달려 있다. 삶은 곧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한데, 죽음의
문제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삶의 문제만을 붙들고 씨름한다. 그러다가 정작 살만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삶과 죽음은 반의어가 아니라
동의어이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은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목인 것이다. 그러므로 살면서도 죽음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또한 죽음을 잘
준비하면서 생활하면, 더욱 깊고 진지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곧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이 되느냐가 결정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삶의 한 복판에서 죽음을 보라.”고 했다.
죽음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죽음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도, 또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도 다른 동물이나 식물처럼 육체의 죽음으로 영영 끝장나 버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도 갖지 못하고 삶을 비관해
버리기 쉽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직접 죽어 봐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삶과 죽음을 얼버무리고
만다.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느냐?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느냐? 그런 것은 골치만 아프다’고 말한다.
일부러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며 현실 생활에 골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과는 달리, 신앙인들은 죽음은 ‘참 삶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써 새로운 삶(영생)이 펼쳐진다고 믿는다.
어느 묘비에 새겨져 있는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란 말처럼,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갈 때, 삶을 가장 가치 있게 꾸밀 수 있고 죽음을 가장 아름답게 준비하는 삶이
되게 하지 않을까 싶다. ‘위령의 날’인 오늘,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의 공로를 통하여 그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