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양들을 보내시듯 세상에 그들을 파견하시며 박해를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스승인 예수님도 지도권으로부터 그렇게 박해를 받고 있기도 하고 장차 더 심하게 받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늘 박해를 받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악한자들의 행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악한 생각과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힘과
권력을 쥐고 있으면 박해는 더 큽니다. 거기다가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백성들의 무지함도 가세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군중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두려 하지 마라."
오늘의 짧은 본문에서 두려움이란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세 번은 '두려워 하지 마라'이고 한 번은 '두려워 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파견된 자로서 그 어느 것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또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도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진리를 추구하면서 진실만을
말하고 산다면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이 당당 할 것입니다. 그래서 떳떳이 밝은 데서 말하고 지붕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인간이 마음대로 낙태, 조작, 상품화 하는 일들은 진리에 역행하는 것이기에 세상이 어떻게 말하든 우리는 지켜야할 당위성을 떳떳이 밝은데서, 지붕
위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두려워 흐름에 그냥 따라갈 때 예수님은 "네 눈이 너를 죄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 지는 것 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9,47)고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근거, 즉 우리가 당당할 근거가 있습니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즉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힘주어 말합니다. 그는 목숨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이방인들의 지역에서, 또 동족들에게 복음을 당당히 선포한 사도였습니다.
제 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신뢰를 두며 오히려
그분을 찬미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느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경외함)은 성령의 은혜이며, 지혜의 시작이요 완성으로써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다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대상이 하느님일까? 생각합니다. 남들의 시선이 두렵고, 소외당할까 두렵고, 명예를 잃을까 두렵고.... 두려움의 실체들은 결국은
나의 안전, 애정, 힘, 명예들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잃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깨닫고
또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은 참자아의 회복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