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상지원단

2013.03.15 09:05

연중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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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충석 루까 신부 anch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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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심 기도 하러…

북한산 둘레길 입구에 있는 내 아파트 창문으로 산이 나를 부르며 산에 오라고 나를 유혹하는 것 같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신학자는 ‘성사란 무엇인가’ 라는 조그만 책자의 ‘들어서는 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 방 창문으로 나를 늘 찾아오곤 하는 산에게 이 조그만 책을 바친다.

태양이 그 위에서 때로는 활활 타고 때로는 살살 어루만진다. 자주 비가 쏟아지 기도 한다. 안개가 포근히 감싸고 있는 때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산이 더위나 추위를 불평하더라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산은 한 번이라도 자신의 웅대함을 내세워 맞갖은 대우를 요구한 일이 없다. 자신의 은공을 알아나 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산은 마냥 자신을 줄 뿐이다

– 깡그리 거저.

햇살이 쓰다듬고 있을 때라 해서 바람이 몰아칠 때보다 장엄함이 덜해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누가 바라보고 있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누가 타고 올라도 끄떡도 않는다.

산은 마치 하느님 같다. 모든 것을 지탱하며 온갖 풍상을 겪어 낸다. 무엇이나 차별없이 포용한다.

하느님은 마치 산처럼 처신하신다. 그러므로 산은 하느님의 성사다. 다른 지평을 계시하고 상기시키고 지시하며 안내한다.

산이 이러하기에 나는 산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 책에서 내가 꾀하는 것은 성사스런 말을 해 보자는 것이다. 산이 입이 있어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산 자체가 바로 그것인 - 그러기에 도리어 더욱 뜻 깊 은 - 그런 말을.

곧 산에 간다는 것은 기도생활이고 나무들과의 대화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나만의 명상의 공간을 찾아가는 순례이다. 성서에서도 예수님은 때때로 외딴 조용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산은 그런 의미에서 성지이며 성전이다.

시편 저자들도 “많은 백성이 그리로 물려와 말하리라. 오너라,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가자. 주님은 당신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리니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세.” 라고 노래했듯이 자연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러 나는 오늘도 산에 간다.

1923년 천재적인 유대계 철학자이며 신비가인 부버가 독일에서 ‘나와 너’라는 깊이 있는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이 책에는 “태초에 관계關係가 있다”는 대담한 주장이 들어 있다. 이 표현으로 부버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관계의 행위로 보는 깊은 통찰력을 보여 준다. 그는 관계의 세계를 ‘나-너’ 차원과 ‘나-그것’ 차원으로 나눈다. ‘나-너’ 관계와 ‘나-그것’과의 관계의 구분은 부버가 인간을 둘러싼 모든 대인관계를 제시하는 규범이 된다.

처음에는 마르틴 부버가 인격적이고 인격간人格間의 것은 무엇이나 ‘나-너’ 관계로, 비인격적인 것은 다‘ 나-그것’ 관계로 양극화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부버의 관계 제시에는 양극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인 인간 자세의 양극화이지 범주상의 양극화가 아니다. 이 말은 인간관계가 선험적으로 ‘나-너’니 ‘나-그것’으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 세계’(It-world)도 때로는 나에게 너로서 말을 건네오며, 때로는 ‘너 세계’(You-world)도 나에게는 그것이 될 수가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런가? 부버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영역에서 우리 앞에 출현하는 모든 사물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자 너의 옷자락을 흘끗 보게 된다. 그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영원자 너의 숨결을 감지한다. 그리고 각각의 너 안에서 우리는 영원자 너에게 말을 건넨다.’

故 법정스님의 저서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는 산중에서 사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외떨어져 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자연의 리듬에 따라서 나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내 길을 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사람보다 나무들이 좋아서일 것이다. 홀로 있어도 의연한 이런 나무들이 내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거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들이여, 고맙고 고맙네!

산에서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우리 자신의 삶의 리듬을 찾아야 한다. 자연 생명의 리듬을 찾아 나의 생명의 리듬을 찾자.

산중에서 가부좌하고 나무들 사이에 앉으면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이런 시가 떠오른다.

김형영 시인의 ‘ 나무 안에서’라는 시다.

산에 오르다.

오르다 숨이 차거든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가자.

하늘에 매단 구름

바람 불어 흔들리거든

나무에 안겨 쉬었다 가자.

벚나무를 안으면

마음속은 어느 새 벚꽃동산,

참나무를 안으면

몸속엔 주렁주렁 도토리가 열리고,

소나무를 안으면

관솔들이 우우우 일어나

제 몸 태워 캄캄한 길 밝히니

정녕 나무는 내가 안은 게 아니라

나무가 나를 제 몸같이 안아주나니,

산에 오르다 숨이 차거든

나무에 기대어

나무와 함께

나무 안에서

나무와 하나 되어 쉬었다 가자.

산에 간다는 것은 정화된 회개의 길을 가는 것이다. 대자연의 질서로 돌아가려는 정화와, 인간관계에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는 회개의 마음이 합쳐져 더없이 맑아진다. ‘인자仁者 요산樂山 지자智者 요수樂水’ 라고 옛 성현도 말하지 않았는가? 오르막과 내리막, 평지와 돌길,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한 고개...산길을 걸으면 인생이란 산맥을 걷는 것과 같다는 생각으로 저절로 묵상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숨결이 없는 삶은 비참한 삶이다. 충분한 물이 없는 식물은 한동안은 메마르게 살 수 있겠지만, 꽃을 피울 수는 없다. 우리의 삶도 사랑을 호흡하지 않는다면 이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동시에 우리 각자의 중심에는 숨겨진 신원이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잠들어 있으며, 마침내 입 맞추어 깨어나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입맞춤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띤다. 프란치스코의 경우 그것은 나병환자의 입맞춤이었다. 안토니오 성인에게는 성서구절로서, 그를 새로 태어나게 만들었다. 사랑이 우리의 삶에 어떤 형태로 들어오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를 보다 나은 자아가 되도록 초대한다. 더 용감해지고, 더 친절하며, 더 용서하고, 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더 변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게 만든다.

많은 성인들은 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사랑의 눈길을 받았던 자캐오와 같은 경험을 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 이 사랑 안에서 그들은 새롭게 시작하고 불가능한 것들을 하며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용기를 발견했다. 요한 복음사가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사랑합니다”(1요한 4,19)라고 썼듯이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남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이 분명히 드러난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 안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마음을 열고, 앞서 말한 하느님의 아가페가 우리 안에 내려올 수 있도록 우리가 마음을 열면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통해 타인을 사랑하시도록 허락할 수 있다. 성찬례나 기도 중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려오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일수록, 그분이 우리 안에 넘쳐날수록 다른 사람과 함께 그분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우리 안에서 그분께서 사시게 하고 행동하시게 하면 할수록 남을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연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느님도 창조물인 인간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떼이야르 샤르댕 신부님은 세상에서 지내는 미사에서 “주님! 여기는 프랑스 에느 숲도 아니고 중국 대륙에서 제대도 빵도 포도주도 없사오니 나는 지금 이 세상 안에 있는 당신 피조물 모두를 이 세상이란 제대 위에 놓고서 주님의 몸과 피로 모두가 하나 되기 위한 이 세상에서 지내는 미사를 지내나이다.”하며 기도하셨다.

성찬례 미사 중에나 기도 중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내 자신이 마음을 열 때 대자연도 산도 나무도 우리 마음 안에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준다. <소로우의 일기>에서 소로우는 이렇게 쓰고 있다.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다.’ 라고.

산 중의 침묵 그것은 대자연과 하느님의 언어인 침묵이다. 산 중의 침묵은 산이 입이 있어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 산 자체가 바로 그것인 - 그러기에 도리어 더욱 깊은 - 그런 말을‥

나는 명상의 길을 만나러 산에 간다. 높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히 변모하셨듯이 내 영혼 육신이 건강하게 거룩히 변모되어 그분 뜻에 더욱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오늘도 나는 산에 간다.

고승들은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아름다운 마무리 죽음을 위하여 산을 찾는다고 한 다. 아주 깊은 산골짜기까지 계속 걸어가다가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을 때에 그 자리에 조용히 쓰러져 마치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져 땅위에 눕듯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쟌자크 루소의 말대로 인간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므로 흙으로 만들어져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출발점과 종점을 묵상하러 나는 오늘도 산에 간다. 산중에서 향심기도를 하기 위하여 가부좌하고 앉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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