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상지원단

2014.09.26 22:44

연중 제2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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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정철 세례자 요한 신부 <kenosis1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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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인식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 1독서: 에제키엘 18,25-28 2독서: 필립 2,1-5 : 마태 21,23 ~ 32)


역설의 진리

 

성경은 역설의 진리로 가득합니다. 의인과 죄인의 역설, 첫째와 꼴찌의 역설, 가난과 부의 역설, 낮춤과 높음의 역설, 바리사이와 세리의 역설, 십자가와 부활의 역설.

 

오늘 주님 말씀 또한 가히 역설적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마태 21,31). 수석사제와 원로들, 그들에게는 세리나 창녀와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굴욕적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직업상 죄인인 세리, 윤리적 죄인인 창녀, 그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공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반면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 그것도 수석사제 그리고 백성의 원로들은 그 누구도 범치 못할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회구조 안에서 예수님은 죄인과 의인의 순서가 거꾸로 바뀔 것이라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당시 종교적·사회적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폭탄선언이었습니다.

 

자아인식

 

세리나 창녀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께 매달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사제와 원로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그들은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마태 21,32)습니다. 수석사제와 원로들은 외적 준수는 있지만 내적 자아 인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있었던 본당 공동체에서 신자들끼리 다툼이 있어서 상담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쪽 얘기를 들어보면 저쪽이 아주 못된 것입니다. 이쪽은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쪽 얘길 들어 보면 이쪽이 나빠도 보통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쪽은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남의 잘못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자아인식의 부재.

예수님은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1-42) 우리는 늘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예수의 영성은 우리 모두에게 자기 자신을 보고 자신의 위선과 제 눈의 들보를 인식할 것을 촉구한다. 위선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아닌 존재로 가장하는 것이며, 거짓 이미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앨버트 놀런, 오늘의 예수, 130.)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오직 자아 인식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모든 인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또한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네가 하느님을 알고자 하면 우선 네 자신을 알도록 힘쓰라.”(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자신을 알게 되면 하느님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향심 기도에서는 자기 인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 인식은 인격의 어두운 면을 의식하게 되는 과정에 해당되는 전통적 용어이다.”([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1장 관상기도의 차원) 향심 기도가 우리를 하느님 손에 맡겨드리는 것인 한, 그것은 하느님께 우리의 정화를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자기 인식의 과정을 직면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 궁극적으로 우리의 참자아와 접촉하는 유일한 길이다.(상동 제7장 무의식의 짐을 덜어냄) 그렇습니다. 자기 인식의 과정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 궁극적으로 우리의 참자아와 접촉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무것도 아님

 

내가 나의 숨겨진 오만함과 교만, 위선과 탐욕, 거짓자아임을 알게 되면 하느님의 인내와 기다리심과 용서하심을 알게 되며 그분이야말로 영원한 사랑과 자비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와 가난함과 나약함 등의 체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할 때,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실제 내가 가난한 존재임을 알게 되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알게 되면, 풀잎에 이슬처럼 아침 햇살이 비치면 사라지는 존재임을 알게 되면,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지는 무상한 존재임을 알게 되면, 한낱 숨결일 따름임을 알게 되면 우리는 무한하시고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겸허해집니다. 하느님 없이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은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이라는 폭군과, 그리고 한계를 가진 문화적 조건화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중단하는 것입니다.”(인간 조건, 토마스 키팅, 64.) 무아에 이르면 참 자아에 이릅니다.”(상동, 68.) 우리는 2독서의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필립 2,5)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저 자신보다 더 저를 잘 아시는 주님, 성령의 빛을 비추어 주시어 제 마음 속 어둠을 깨닫게 하소서. 허물과 죄와 교만과 이기적인 계산으로 누벼놓은 오늘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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